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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 백시종 장편소설
백시종 지음 / 문예바다 / 2025년 1월
평점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멀리 어른거리는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80대의 소설가 백시종 선생의 마흔네 번째 장편소설 <수평선 너머>는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일제강점기 중후반부에서 해방 후 3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전 혼란 정국, 한국 전쟁의 발발까지의 흐름을 바탕으로 전라남도 여수 땅을 무대로 펼쳐진다. 여수는 제주 4.3도민항쟁 진압을 위해 이곳에 주둔해있던 육군 14연대의 진압 출동을 계기로 김지회를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들고일어났던 여순항쟁으로 이어지는 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과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갔던 당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서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기독교 신자는 3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고 당대 사람들은 앞으로 들어설 정부 역시 78퍼센트가 사회주의(공산주의)국가를 지지한다는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피의 현대사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80년이 지나도록 남북분단 체재는 그대로 이고, 한국 정권의 담당자가 교체될 때마다 전진과 후퇴(진정한 의미의 전진이라기보다는 왜곡되고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시도에서 그치고 또다시 왜곡을 반복하는)를 거듭하면서 제자리걸음 상태에 있는 평화문제,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일본의 자리에 들어선 미국, 현상은 달라 보이지만 모순은 여전히 그대로 인 듯, 지금의 정국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독재자와 기독교는 어떤 관계였을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기독교의 관련 또한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남과 북, 러시아를 유창하게 하는 김성주는 후일 김일성이 되고, 조선노동당(남로당)의 박헌영 부수상은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신문화이지 않았을까, 정치경제를 아우르는 또 다른 집단으로서의 얼굴을 드러낸 것 말이다.
이 소설 속 행간에는 해방정국 3년뿐만 아니라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 사건의 모습이 겹쳐오기도 첫 발화가 된 나주역 사건, 광주발 통학 열차에서 벌어진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희롱사건, 나주역에 있던 희롱당한 여학생의 사촌 동생이 일본인 학생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집단 싸움으로 일본인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만 폭행, 이를 계기로 학생시위가 일어나고. 이런 일은 그저 그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여수에서도 또 그 어디에서도 일어났던 보편적 현상이었음을.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구천광은 여수경찰서 형사과장 아들로 여수에 사는 일본인 학생들의 우두머리 모리시마가 가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그를 반죽음으로 만들어놓고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도망치고, 지아비와 아들이 떠난 집에서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 그리고 먼 친척뻘로 구천광의 어머니를 고모라 부르며 이 집에 얹혀사는 홍도섭, 지주 집안이었던 구씨네를 요시찰 대상으로 올려놓고 늘 감시하던 일본의 개 조선 순사 마갑성과 이 집안 머슴으로 행랑채에 살았던 장원장, 이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이야기에 맨 먼저 등장하는 구천광은 상하이에서 박헌영을 만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이 소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풀어가는 “나” 홍도섭, 때로는 작중에 개입하기도 한다. 나를 중심으로 본 여성들, 구천광의 배다른 동생 천숙과 나를 좋아하는 분심 등이 등장한다. 소설의 대단원에 이르러 주인공이자 화자인 홍도섭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으면서 마주하는 환상, “수평선을 넘는”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대목은 교과서에 실렸던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의 주인공 정익호는 삵이라 불렸던 그가 만주 땅에서 중국인 지주의 땅을 부쳐 먹고 살던 마을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붙여진 별명이 삵이다. 암적 존재였다. 어느 날 소작농 대표 송 첨지가 중국인 지주 집에 갔다가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매 맞아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삵은 중국인 지주 집에 쳐들어가고, 그 역시 허리가 꺾일 정도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소원은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고. 수평선 너머로 붉은 산과 흰옷이 보였을까,
구천광은 공산주의자가 돼 조선으로 돌아왔고 해방을 맞이했다.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지고 미군의 국내 진주와 함께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이른바 인공이 활동하자, 친일파들은 도망치기 바쁘고, 숨 죽여 산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맨 먼저 도망치는 쥐처럼, 하지만, 남한 단독선거에서 반대하는 시위가 제주에서 벌어지고, 이를 탄압하면서 4.3사건이 일어나고, 육지에서는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지만, 해산하고 마는데. 이 소설 속 친일파의 상징 악질 마갑성은 지옥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고, 구천광은 죽는다. 이렇게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 홍도섭은 아내 천숙과 아이들을 잃고 해군기술병으로 입대, 하와이에 배가 머물 때 망명을 꿈꾸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다.
이 소설 너머로 최인훈의 소설<광장>이 보이기도 한다. 남북분단의 이데올로기적 한계 극복을 주장하고 남북한의 정치 체제를 대등한 관점에서 비판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은 평범한 대학생, 남북에서의 생활을 모두 경험한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 전쟁포로가 돼 남, 북, 중립국을 고르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결국, 그는 중립국을 선택하고 도착하기 전에 배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의 수평선 너머에는 뭐가 있었을까,
작가의 말에서 백시종 선생은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인이란 사실을 자랑스레 여겼지만, 종교소설인 <오홈라르 음악회>를 쓰면서 성경의 재해석을. 그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기독교의 이모저모를 종교적 맹신이 아닌, 공정한 사회 비판의 눈으로 재분석하겠다는 의도로 <수평선 너머>를 썼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