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 인생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명상록 읽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김지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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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이남훈의 <좋은 사람 되려다 쉬운 사람 되지마라>(페이지북, 2024) 은 나 자신과의 공세적 대화(자신을 일깨움)의 유의미성을 설명하면서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현제의 마지막 스러져가는 로마, 그는 오랫동안 전장에서 삶과 죽음을 눈앞에서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서 누구한테도 토로할 수 없을 때 자신과 대화를 했는데, 바로 유명한 <명상록>이 그것이다. 명상록에서는 아우렐리우스 자신을 ‘너’라고 했다. 글쓰기는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유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양고전의 숲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지혜를 찾던 이남훈도 <명상록>을 자신과의 대화의 정수라고 생각한 듯하다. 나를 다잡는 것은 평생의 필업이다. 


<미움받을 용기>를 쓴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 고문 기시미 이치로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재해석한 것이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기시미는 서양 고대철학 연구자이면서 심리학 공부를 해왔다. 그가 명상록을 접한 것은 대학원 시절 어머니를 병간호하면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써 내려간 아우렐리스우스의 일기에서 직접 뽑아낸 글을 엮은 것이다. 


책 구성은 13장 58꼭지다. 1장 아우렐리우스와 <명상록>에서 시작하여 13장 <명상록>을 넘어서까지다. 그 안에 철학이 나를 지킨다를 비롯하여 자신을 본다, 감정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자연과 일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법, 곤경, 선악, 운명, 죽음 등을 명상록 속에서 길어 올려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우렐리우스라는 인물은 황제도, 정치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소년 시절부터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고, 스토아학파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에픽테토스의 말을 제자가 기록했던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에픽테토스, 페이지2, 2024) 책의 소개에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가 소년 시절에 노년이었던 에픽테토스와의 접점은 그의 스승 루스티쿠스가 소장하고 있던 책에서 에픽테토스 사상을 알게 된 듯하다. 


명상록은 야영 천막에서 자기 생각을 담았던 것이 글로 원제는 “자기 자신을 위한 메모” 였다. 누군가를 위해 쓴 게 아니고 그저 나를 위해서 썼다. 그는 황제가 돼서도 철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듯, 공동황제 제도를 만들고 함께 통치했지만, 두 명의 공동황제도 먼저 죽는다. 결국, 자기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넘겼지만(2000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콤모두스)끝은 좋지 못했다. 이미 기운 로마제국의 쇠락 기운이 강해지고….


있는 그대로 자기를 보라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광기의 산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5-17)”


기시미는 원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인지는 쓰여 있지 않지만,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광기의 산물이다.’라고 해석했다. 오히려 원문이 의미전달이 잘 된 듯한데, 불가능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 않기에 광기라고 말한 듯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는 것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게 아니냐는 의미로 말이다. 


에픽테토스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생애는 누구에게나 한 번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생애는 이제 끝나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는 자신을 존경할 줄 모르고 그저 남의 영혼 속에서 너의 행복을 찾고 있구나(2-6)”


너는 자신을 존경할 줄 모르고라는 대목, 기시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라는 말을 아우렐리우스 자신을 향해 던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자기 자신, 자기 안의 신성을 존경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로, 그가 그렇게 말할 리 없다고 달리 읽는 사람도 있지만, 기시미는 이 대목을 어떤 일에도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은 오랫동안 배우고 실천해 온 스토아 철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외부에서 해를 당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밖에서 일어난 일로 불행해지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의 협조를 하는 것과 부정을 저지르는 일은 사려 깊지 못한다는 것 역시 스토아 철학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도 아직 자신이 이도 저도 하지 못했다고 아우렐리우스는 적고 있다. 


기시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회의(懷疑:충분한 근거가 없어 판단을 보류, 중지한 상태)는 철학을 하는 데 필요한 태도다. 다른 사람이, 그것도 많은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 스스로는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안이하게 상식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아우렐리우스는 노트에 진짜 자기 생각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조금씩이라도 전진한다면 충분, "지금 급발진 과속 중인 우리 사회"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바라지 마라. 조금이라도 전진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 성과를 하찮게 여기지 말라(9.29)”


아우렐리우스는 플라톤이 이상으로 하는 철인 정치를 구현한 현제다. 아우렐리우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 정치는 이상이며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이라도 해나가자고 다독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시미는 아우렐리우스가 적극적으로 철인왕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으로 봤다. 정치에 긍정적이지도 않았기에 ‘조금이라도 전진하면’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라 새겼다. 황제도, 정치가가 될 생각이 없었던 아우렐리우스, 이상을 내걸어봤자 어차피 실현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실망할 바에야 처음부터 이상을 내걸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현실에 매몰되고 만다. 


기시미의 독법으로 본 <명상록>은 마치 유교를 재해석하거나 새롭게 보는 해석, 신 유교의 주자학처럼, 해설과 해석, 주석이 달리듯,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적 계보에서는 B급 수준이겠지만, 철학의 고전이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에서 “나를 찾는,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서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생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명상록, 왜, 지금,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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