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 ㅣ 서사원 영미 소설 1
패트리샤 박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9월
평점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
알레한드라, 알렉산드라의 스페인어 발음, 우리말로 굳이 말하자면 영희, 순희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주 배경을 가진 부모,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또 미국으로, 한국의 여느 부모들처럼 자식 하나 잘 되기를 바라며 뒷바라지를 위해 분골쇄신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 잡고, 좋은 사람 만나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그런 삶을, 적어도 너희들에게만큼은이란 단서가 붙는다. 여하튼 이런 무서운 고정 관념은 제 몸 하나 희생해서 아이들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으니 이를 뭐라고 해야할까.
바로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늘 알레하-야라고 나를 부르던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엄마와 단 둘이 사는 고등학생 알레한드라 김, 도시락은 흔한 샌드위치 빵에 가공식품을 싸가, 제대로 펼쳐놓지도 못한 채... 학교 수업에 들어가면 담당 선생님들은 알레한드라라는 발음을 못 해, 앨리 존 드러, 알렉산드라, 아레 하아아아아한 두라, 뭐 누구 잘못이겠는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인종의 용광로요 샐러드 볼인걸, 어디에서 그 재료가 들어왔던 섞이면 그만인 것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소설 속 알레한드라는 뉴커머가정이다. 뭐 굳이 표현하자면 다문화가정(글쎄 다문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밖에서 들어온 외부자란 뜻이 강하다. 일종의 계급성을 부여한 듯한)
퀘이커 오츠, 가을 학기 첫 수업의 에피소드
고등학교 4학년 졸업 학년이다. 선택과목 글쓰기 수업의 강사로 온 소설가 존 조너선을 통해서 미국의 문화예술창작 등 아무튼 소설가라는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출석을 부른다. 잘 나가다가 알레 한들이라는 건너뛰면서 하는 말 “다문화로 접근하면 대학 가는 데는 문제 없겠네.”라고 완전한 인격모독에 인권침해다. 인권 감수성이 제로인 그가 가르치는 수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알레한드라는 제인, 안잘리, 지영 같은 평범한 적어도 그에게 어울리는 그런 이름을 갖고 싶었는데 말이다. 절친 로럴, 존 조너선 부루스의 인권 감수성 제로를 질타하면서 그를 학교에서 쫓아내기로 하고 서명을 받는데. 그 이유가 알레한드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고자 했던 대학에 들어가려는 스펙쌓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주된 기둥 중 하나다. 존 조너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문제가 될 말을 한다. 아마도 작가는 존 조너선이란 백인이고 소설가를 통해, 미국 중산층, 아니 전형적으로 미국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보이지 않는 계급상층에서 아랫것들을 대하듯 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아주 의도적으로 말이다.
해피데이 세탁소의 윤아 고모와 사촌 오빠
고모의 아들 마이클은 사촌오빠고 동성애자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아빠의 누나다. 해피데이라는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 교육에 열심이다. 사람들은 세탁소 주인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관심 없다. 대체로 중국인으로 지레짐작하고 말을 건네지만, 아무튼 이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한국계 미국인 미셸 미정 김이 쓴 책<우리는 모두 불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쌤앤파커스, 2024)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이 책을 보면 알레한드라 김의 이야기 배경이 되는 치열한 사회밑바탕과 흐름을 이해하기 쉽다.
미셜 미정 김은 BIPOC(흑인, 원주민, 유색인)라는 개념의 사용도 맥락 없이 아무 데다 쓰면 안 된다고 말한다. 딱 들어맞는다. 작가 패트리샤 박이 공유하는 이해와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오빠 마이클은 그가 다니는 업계 상위를 달리는 증권회사다. 그 안에서 그는 어떤 취급을 받는지 마치 대기업 다닌다고 대단하고 추켜세워주지만 정작 당사자는 힘들어하는 것처럼, 마이클은 회사의 경우를 빗대어 알레한드라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한다. 이미 학습된 무기력을 경험했기에. 용감하게 교장에게 문제제기하고 강사를 쫓아내던 나를 다른 수업으로 옮겨주든 하라고 그 순간 대학에 필요한 성적은 어떻게 되겠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알레한드라를 설득하는 마이클,
이것이 뉴커머들의 이야기다. 존 조너선에게는 배제하는 언어를 쓰지 말라고, ”그건 좀 게이 같아“ ”남자답게 굴어“ ”너 계집애냐“, ”불법 이민자“ ”게토“등 미묘하게 차별의 뉘앙스를 담은 언어도 있다. 미묘하다. “너 어디 출신이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문턱을 낮추고 싶지는 않다“ 포용적인 언어를 쓰라고, 미국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불리기 원하는 대로 인정하고 지칭하며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표현들이, 마치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현혹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말이다.
“누가 말하는지가 중요” 이 대목은 “왜 이 언어를 쓰는지, 역사적 배경,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 차별, 트랜스 혐오, 동성애 혐오 등 다양한 형태의 억압이 여전히 만연하며 주변화된(혹은 대상화된)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그 억압이 느껴지는 가운데 주변화된 이들이 되찾으려 하는 억압적 용어가 그들을 억압하는 시스템에서 계속해서 이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될 경우, 해당 언어의 애초 목적인 폭력이 또다시 더해지고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다. 내가 이 용어를 사용하면 누구에게 이로운지, 또 누구에게 해로운지 등을 말이다. 생각하면서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꿈많은 여고생 알레한드라의 성장이야기다. 주변부 사람으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밑바닥을 친 자존감을 이제 겨우 한 단계씩 회복하고 있지만, 그 과정의 순간마다 가면을 써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기에 맞춰가기 위해 표정을 감춰야 했으니….
패트리샤 박이 이 소설에서 자신을 투사했던 알레한드라를 통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주변의 기대에 떠밀려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포기하는 건 아닌지를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알렉한드라의 김의 솔직한 고백은 패트리샤 박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넌 한국인 아니라는데,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아니라고 앞에 뭐가 붙은 미국인...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 일어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가면증후군일지도...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