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 역사의 대척점에 선 형제, 부여융과 부여풍
이도학 지음 / 주류성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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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

이도학 선생이 자신의 쓴 논문 등을 정리한 이 책<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역사의 대척점에 선 형제, 부여융과 부여풍 형인 융은 친당파, 동생인 융은 친왜파로 고구려와 힘을 합해 신라에 대응해야하고, 이들의 부왕인 의자왕은 절대권력에 여성을 밝히는 몽매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정약용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했다”고 했다. 삼한 가운데 고구려를 제치고 백제의 국력이 앞섰음을 확실했던 모양이다.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이자 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어서 우리가 아는 “백제”는 660년 나, 당 연합군에게 패망했다, 이후로 흑치상지나 마지막 왕자가 삼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슬픈 “마의태자”의 전설만이 기억될 뿐이다.

이 책은 부여융과 부여풍이 둘 중 누가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는지, 백제를 응원하기 위해 온 왜군이 백강 전투에서 패배(왜군파견은 그렇게 순조롭지 못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또한 밝혀지지만)했는데, 도대체 그 백강과 왕성이라는 주류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꽤 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 당대 상당한 지위에 있지 않고서야 들어갈 수 없는 곳, 친당파로서 백제 수복 운동을 진압한 공을, 당대 흑치상지 역시(부여 씨의 일족) 당의 장수로서 북망산에 묻혔다. 조선 시대 안정복은 부여풍이 복신의 추대로 의자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가, 결국 663년 백강 전투에서 패하고, 주류성을 빼앗기자, 고구려로 달아나니 백제가 망했다고, 당은 부여융과 부여풍을 백제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의자왕의 체포로 백제는 멸망했고 이후 왕은 가짜 왕이라고,

백강과 주류성은 어디인가?

지금도 여전히 백강(白江)과 왕성 주류성(周留城)이 어디였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어떻게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가 어디인 줄을 모를까, 꽤 궁금한 대목이다. 위치는 크게 금강 이남과 이북 설로 나뉘는데, 지은이는 현재 통설인 부안 위금암산성설을 검증, 삼족토기편이 출토된 이 산성은 수복 운동기에 새로 축조된 성으로 보면서, 369년 전라북도 지역의 마한을 평정한 후 백제 근초고왕이 왜장을 만났던 장소를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했다.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서명하였다. 후자의 고사산은 고부 두승산으로 비정(되고있고), 왜의 힘이 절실했던 백제인들은 양국의 서맹 장소였던 상징성이 큰 정읍의 두승산을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험절한 정읍의 두승산성의 입지 조건은 주류성의 지형과도 들어맞는다고.

이 책은 우리가 이해하는 한국사의 흐름, 즉 고대국가 삼한, 나당연합군, 당나라와 불화, 전쟁, 통일신라, 발해, 남북국시대 순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실제로 삼국통일이 아닌 병합에서 미화되거나 특정 부분만을 강조,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아들 삼 형제가 불화, 백제 의장왕의 실정 등의 요인이 신라와의 병합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고, 물론 결과적으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지은이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나당연합군의 공격 이후, 실지 수복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백제의 마지막 왕 부여풍(풍장)과 당나라에 투항, 웅진도독을 했던 부여융에게 초점을 맞춰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 전개를 좇는다. 이 책은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반복되는 곳도 참고문헌 소개도 다소 지루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는 백제를 모른다는 표현도 가능할 정도로. 남북문제와 겹쳐 보이는 부분도 있고, 현재 미, 일, 한 군사동맹이 떠오르는 대목도 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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