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 지구인문학의 발견 지구인문학총서 1
허남진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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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에서 지구화로

 

1990년대부터 서구 학계에서는 전 지구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 ‘지구화’는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의 확장이다. 세계화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또 한편으로는 지구촌에 걸친 문화의 전파다. ‘지구화’라는 번역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독일 사회학자 올리히 벡이 쓴 책<지구화란 무엇인가>에서다. 그렇다면 지구학은 뭔가, 지구화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특히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 중심주의로 전환을 꾀하는 학문적 경향을 지구인문학이라 한다.

 

이 책에서 논하는 지구학, 지구인문학은 인간과 지구가 상생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인데, 이제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해야 하는가이다. 2021년 유네스코 발행의<교육의 미래보고서> 열쇳말은 “우리가 공유하는 지구에서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라는 점이다. 지구, 연결, 그리고 협력이다. 현재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생태와 기후위기는 인간만의 진보와 성장을 추구해 온 지구의 경고 또는 반격이 아닐까,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6장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우선 1장 지구화 시대의 지구인문학이란 글은 허남진과 조성환이 지구화의 대두와 지구인문학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상과 지구인문학과의 관계를 살핀다. 2장은 홍대용의 자전설과 관점주의와 라투르의 대지설과 사고전시라는 두 관점에서 본 지구적 전환을 이원진이 썼다. 3장은 지구를 공경하는 종교로 토마스 베리의 지구 인문학을 소개하고 지구를 모시는 종교, 지구윤리를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로 허남진과 이우진이, 4장 인류세 시대 존재론의 전환과 5장 지구학적 관점에서 본 먹음, 먹힘, 6장 인류세 시대 지구 담론의 지형도를 조성환과 허남진이 함께 썼다. 이 중 4장에서는 이규보의 사물 인식과 한용운의 님학, 그리고 5장의 해월 최시형의 식천/제천론은 눈여겨 볼만한 내용으로 지구인문학적 지향은 조선 후기의 실학이나 동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알게 모르게 서양의 것이나 중국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렇게 하는 것이 고품격인양 하는 언행을 해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 선조 중에서도 뛰어난 생각이 있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지구인문학이란 의미를 생각해본다. 현재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지역적 범위를 넘어서 지구로 그 범위를 넓혀보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학문에서의 동양과 서양의 구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통섭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과 한국의 사고를 대비하고, 비교하면서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해명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은 의도적으로 이런 시도를 해 온 듯 보인다.

 

 

 

인간세 중심에서 지구세로 전환

 

2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산업화의 역사는 그 이전의 지구, 곧 만물이요, 자연이라는 사고를 순간적으로 바꿔놓고, 세상에 중심이 인간이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인간 이외의 것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복무해야 한다고, 즉,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 중심사상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생태계의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지구라는 일체화된 것을 대상화시키고, 지구의 모든 존재 위에 군림하는 인간상을, 그리고 이들의 세상인 인류세를.

 

한국사상 속의 지구인문학 사고의 흔적들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한국철학 세계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 유학자 정지운과 이황은 중국의 태극도(만물생성도)에서 한 걸음 나아간 천명도(우주를 하나의 원으로 도상화)를 만들고 그 안에 인간과 만물을. 물론 여전히 인간중심주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홍대용은 당시 세상의 중심인 중국을 축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중국 중심론의 우주론을 비판, 중국 역시 지방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각 별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중심이라고, 중심과 주변이 없이 모두가 중심이라고 본 것은 당시로써는 꽤 도발적인 주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홍대용 이전에 김석문 또한 이런 주장을 했지만, 홍대용의 ‘사물 존재론’ 인간과 물 모두가 성(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뷔르노 라투르, 코스모폴리틱스로의 전환

 

라투르는 지구 대신 가이아 이론을 제시했다. 가이아란 어머니처럼 다정한 여신의 이미지가 아닌 인간 영역으로 침입해 온 매우 거친 자연을 말한다. 19세기까지 인간은 자연이 장관에 무력하고 압도당하며, 전적으로 지배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관점으로 뒤바뀌고, 이에 관한 대응으로 가이아2.0은 거친 자연으로, 다시 인간을 압도하려 한다. 여기서 공존이란 의미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별로 들어보지 못한 지구학과 지구인문학이란 영역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만물 즉, 인간과 물질 모두 지구라는 생각이다. 마치 생물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구의 절반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다른 종의 것이라는 생각과도 상통한다. 트로이 베티스, 드류 펜더그라스<지구의 절반을 넘어서>(이콘, 2023)는 월슨의 사고를 바탕으로 지구의 절반에 인간의 발길을 제한해 다양한 생물종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인류는 더는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기후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한 생각의 전환

 

기후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를 위해 과학수단을 동원하여, 온도 1.5도 낮추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직접적인 시도는 국소요법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온도를 낮추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지구학적 관점, 즉 거시적 안목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대증요법으로 증상발현을 지연시키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지 않을까, 문제는 사고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인데, 모든 만물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지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그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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