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최준식의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 3
최준식 지음 / 주류성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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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한 종교적 체험을 한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종교적 체험의 증좌는 몸과 정신의 변화다. 종교 체험의 강도와 진정성의 정도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다면,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 40대 후반이었던 그가 20대의 외모로...그는 7일에 걸친 대폭발을 경험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현대의 붓다라고 하는 이유

 

지은이 최준식이 주저 없이 그를 현대의 붓다라고 하는 이유를 보자. 유지의 사상에 경도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기는데, 과연 그 이유는, 첫째로 드는 것은 그의 태도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혀 신비화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뿐더러, 깨달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깨달음이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제자를 두거나 교단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지는 조직하는 것을 싫어했다. 조직은 악마가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직을 만드는 순간부터 인간성이 파괴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점에는 나도 크게 동의한다. 깨달은 사람은 세속에 살되 세속과 절연한다. 왕처럼 고대광실에서 살지 않는다. 예수의 유명한 말, 자신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조직은 자가발전하게 마련이고, 사람을 위해 선한 목적을 위해 조직을 했지만, 어느덧 조직이 조직을 위해 작동하게 되는 순간, 통제를 할 수없게 됨은 역사의 경험 속에서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유지는 모든 거창한 호칭을 거부하고 단지 이름으로만 불려, "유지"로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김대중의 면전에서 DJ라고 부르지 않듯, 하지만 유지는 그의 앞에서 유지라고 부르도록...

 

두 번째는 유지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악은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지는 생각이 그치려면 아무것도 없는 무념의 상태가 되려면 여섯 번째 차크라(인간 신체의 여러 곳에 있는 정신적 힘의 중심점 가운데 하나다. 산스크리트어로 ‘바퀴’, 또는 ‘원반’을 의미한다. 물질적 혹은 정신의학적 견지에서 정확하게 규명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중심부), 여섯 번째 차크라라 함은 미간 사이에는 2변의 연화형을 한 아즈나 차크라한다. 이것이 깨어나려면 쿤달리니의 힘이 폭발해야 한다. 일간에서는 쿤달리니가 결국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이르면,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인 시바신과 합일한 것이 되는데 이때 사람은 우주를 주재하는 힘을 갖추어서 해탈을 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유지는 이것은 모두 헛됨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고정된 관념이다. 틀이다. 이것을 깨고 부숴버리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그는 어떤 책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모든 것을 실제하지 않는다. 생각은 근원적인 악이며, 이를 깨는 것이 깨달음이다.

 

꽤 흥미롭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이를 우리는 허무라고 하는데, 허무와는 또 다른 무엇인가라는 느낌이다.

 

불교든 힌두교든 겸손함, 즉,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 수련이라는 점이다. 깨달음 끝은 초월이고, 초월하면 종교는 끝난다. 고통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을 위해서 수련하는 것을 경계한 유지,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해 다른 존재가 되려는 것을 경시했다. 그는 명상 등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되려하는 것은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심지어 그는 당신이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르는 한 당신은 폭력적인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진정 깨달은 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데 우리는 다른 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병통이다. 생각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불교나 힌두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수련을 통해서 무엇인가 되려는 허영을 버리라는 것이다. 허례와 허식은 진짜가 아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있는 그대로... 깨달음 뒤에 영웅으로 숭배되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깨닫지 못함이다. 그가 남긴 게 아무것도 없기에...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간다.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겹쳐온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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