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던 이야기
이종범 지음 / 아마존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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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늘 논쟁거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부철학, 삼위일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가 신학에 영향을 미치고... 크리스토퍼 올스스톤모어<수염과 남자에 관하여>-남자 얼굴 위에서 펼쳐진 투쟁의 역사(서양편)(사일런스북, 2019)에서 예수의 수염이야기 나온다. 죽은 후 부활한 예수는 수염을 길렀다. 살아있는 예수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이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 이 책에서는 거꾸로 신은 왜 예수의 아버지가 되었나라묻는다. 이 책 <예수에 대해 우리가 잘모르던 이야기>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이종범이 지었다. 그는 예수의 전설, 예수의 가족, 그리고 예수의 교회 등 3장으로 엮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너무너무 상식적인 내용이라서, 그저 예수란 이런 사람이다, 아니 하느님의 아들로 신의 모습을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속에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하느님의... 그러기에 누구도 제대로 예수는 누구인가, 사실인가 아니면 전설인가, 인간이었다면 그 가족은 또 교회는 이란 의문이 들수 있지 않는가,

 

지은이는 신학연구자로 이 너무나 당연한 의문에 답을 찾아서 나서는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는 애초부터 다르다. 즉, 예수말씀의 실천을 멀리하고 분열과 갈등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21세기 기독교 교회는 말씀의 성령은 떠나고 부동산투기와 권위주의의 악령이 판치고 있다고, 말세라고, 교회가 타락했다고,아니다. 본디 교회는 그렇게 해왔다. 그게 교회니까, 이 책은 지은이가 긴 기독교타락의 역사를 논하는 3부작 중 1권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어진 자들을 향한 이야기다.

 

예수의 족보가 왜 필요했나

 

반유대주의, 유대인박해는 히틀러 때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줄곧 있어왔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기 전에도 그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현상이 말이다. 반유대주의는 성경 자체에 이미 노골적으로 나와있으니... 현상이 이러한데 이와 모순되게도 유대인과 예수의 관계, 특히 예수와 다윗과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노력, 그 의도는 무엇인가, 바로 족보다.

 

유대교에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메시아가 동시에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라는 논리를 전개한 기독교가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디아스포라 상황에 있던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결국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족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신은 왜 예수의 아버지가 되었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은 세계1, 2차 대전 이전까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인간의 아버지였다. 또한, 그 신은 가부장 제도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그런데 그런 신이 아버지이니 가장도 집에서 제사장으로서 신의 권한의 대리자, 적어도 중계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가 끝났다. 많은 사람에게 이제 교회는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사회의 중심도 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만의 리그로 보일 뿐이다(전광훈의 행적을 보면….) 교회에서 성직자는 아버지 역할을 해왔다. 가부장의 권위는 그의 지휘를 받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이제는 허울만 남아 억지로 강요하는 가짜 권위, 권위주의만 남게 됐다는 말이다.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기독교가 철저히 인격신을 고수하는 한 신은 차가운 우주 원리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의존할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침묵하고 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기독교의 신의 침묵은 신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과의 대화는 역설적이게도 침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신과의 대화는 기도다. 현대에 들어 이런 기도는 개인화되고 있다. 또한,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형식화된 신과 만남의 의미 자체는 이미 없어져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죽은 것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꽤 비판적이랄까, 우리가 다니는 장소, 공간은 신의 집이 아니라 돈과 권력으로 쌓아 올린 적당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래의 장소일까? 늘 의구심이 들던 주제에 관해 지은이는 꽤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교회라는 공간이 없더라도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는 말도 실은 인간의 탐욕이 신을 죽인 것이다. 기독교인이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절대자에 관한 의지 혹은 의탁은 여전히 남아있다. 내 마음속의 신 말이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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