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마음결 도덕경
김영희 지음 / 아름다운비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덕경 읽기의 자유로움

 

지은이 철학자 김영희는 도덕경을 경시했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도덕경을 읽는 사람의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에 따라 그 내용은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때도 또 삶에 관한 성찰의 계기로, 한없이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든 그 무엇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자연의 마음결 도덕경>, 제목 "자연의 마음결"이라는 표현이 아마도 지은이가 접한 도덕경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촌철살인이다. 그러하는 마음결, 무지는 무지=모른다는 뜻은 일반적 용법과 달리 여기서는 무지는 곧 도의 체화,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의 상대적 표현, 하지만 여기서 무지는 초월이다.

 

김영희는 삶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다. 도덕경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다. 내가 변하고, 주변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가 온 세계가 변하고, 온 우주가 변한다. “덕인”은 도를 체화하고 이 세상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보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다. 그가 도덕경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이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근원을 묻는 왜 보다는 기왕의 것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를 어떻게…. 노자가 다른 철학자보다 사상가보다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관계론”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다른 도덕경책과 비슷하면서도 그만의 단어가 들어있음을 눈여겨본다. 

 

그렇다면 노자의 무위사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역시 "무(無)란 무엇인가?"를 우선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세상 사람들은 공자를 중심에 놓고 동양철학을 논하기에 상대적으로 노자에 대한 오해가 많다. 노자, 공자 모두 문명론자들이며, 노자의 자연을 돌아가라는 말은 자연 운행처럼 자신의 삶 속으로 가져오라는 말이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 은퇴, 은거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영희의 도덕경 풀이와 최진석의 견해를 비교해봄으로써 김영희가 개인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어떻게 느낌이 달라지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에 관하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1장 2절,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를 피상적으로 부르는 것은 이름이지만, 이름은 실체를 나타내지 못한다. A라는 실체를 a, b 라고 부르더라도 그것은 A의 참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없다. 이름은 부정확하고 단편적인 기호일 뿐이고 사회 내에서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일 뿐이라고. 유와 무 또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을 최진석은 명은 정의, 개념화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것들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노자가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고 말했다면 개념화의 문제가 중요한 주제라 본다.

 

공자의 정명론이 이에 대립하는 것으로 개념을 정하고 이 개념과 실제와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확고히 하자는 것이며,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정해놓으면 실제의 내용이 이 개념에 다 담기지 않는 현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 개념을 정하는 일이 효율성이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보는 이가 노자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개념을 분명히 정하고 정의하면 그 정의가 그 개념을 완전히 가둬버리기 때문에 이 대상의 활동성이 좁혀질 뿐 아니라 개념을 확고하게 정하면 정할수록 그것을 지키려는 신념이 강해져서 그것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는 부정적인 현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세상은 특정 범위 안으로 가두어지지 않는 부문이 훨씬 크다.

 

유무상생(有無相生, 2장)에 관하여

 

노자는 관계론이요 이에 대비되는 것은 공자의 본질론이다. 노자는 새로 생겨난 것은 죽어가는 쪽으로 이동하고, 움푹 파인 것은 채워져 결국 평평한 것이 되듯, 자연 전체는 반대쪽으로 이동한다는 사실 즉,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으로 도의 작용이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힘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대되는 것끼리 이루는 한 쌍, 이 상호관계가 세계의 진실이라 생각했다. 즉 유, 무 상생으로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대비, 대립적으로 하나의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노자가 가장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구분"이다. 구분이야말로 폭력을 일으키는 주요한 출발점이라고 본 것이다. 구분하는 근거는 "기준"이고, 기준이 태어나는 토양은 본질이다. 따라서 폭력을 제거하려면 기준을 없애야 하고, 기준을 없애려면 본질을 부정해야 한다. 노자는 세계를 비본질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기준이 태어나는 원점을 붕괴시킨다. 

 

김영희는 아름답다는 것과 추함을 나누는 것,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아름다움, 추함, 선, 악, 양심 등은 모두 상대적인 의미이고, 각 사회의 문화와 관습, 종교나 습관 등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사실 미, 추, 선, 악은 문화적 산물일 뿐….

 

오늘날 한국, 세계적인 현상의 하나인 불평등, 혐오, 불공평, 불공정, 차별, 혐오, 장애 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바로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기준을 없애면 모두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노자는 보이는 대로 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보려고 하는 것만 보면, 기준 속에서 한쪽만을 취하게 되고, 다른 한쪽을 보지 않음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8장) 노자의 사상 이해의 핵심인 "물“

 

선은 도를 의미하고, 착하다는 뜻의 선이나 유가에서 말하는 선이 아니라, 물로 비유된다. 김영희는 우리 마음을 늘 고요하게 유지하는 것, 즉 마음 다스리기를 말한다. 인간이기에 세상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건들을 경험하기에 요동이 안 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요동치더라도 금세 원래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 풀이한다. 

 

최진석은 선(善)은 착하다는 뜻보다는 탁월하다는 뜻에 가깝다.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어떤 특성이 있는가?

 

만물을 이롭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지구상의 생명은 물을 토대로 한다. 철학을 연 탈레스도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 했다. 물은 이미 허락된 길만 찾아서 흐른다.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도 허락된 길을 그저 흐르면서 수행할 뿐이다. 무엇과도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고, 무엇이 자기 앞길을 막아도 다투지 않고 그저 묵묵히 돌아갈 뿐이다. 물은 이런 특성이 있어 모두가 좋다고 하는 곳에는 처하기 어렵다. 좋다고 하는 곳에는 이미 다른 것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게 뻔하다. 그래서 물은 사람들이 모두 안 가려 하고 싫다고 하는 것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여 물은 결국 가장 탁월해지는 것이라고….

 

진정한 무는 유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원하는 무나 허는 유, 충을 경험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지하기 위해 더 많이 공부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순수한 아이처럼 되기 위해 삶의 치열함을 반드시 경험해 봐야 한다. 노자가 말한 무지한 백성은 요즘 시대로 말하면 자기 성찰에 능숙한 철학자들이다….

읽어 또 보면 한이 없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세상의 이치는 도라 하지만, 결국 아는 만큼 보이고 거기에 아는 만큼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이것이 틀이요. 관념, 고정되고 관성이 된 생각일 뿐이다. 세상은 창대하여 내 생각 밖의 일들이 무수하다. 늘 읽어도 읽어도 새롭기만 한 것은 아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심오한 그 무엇에 다가가고 있는다는 뜻이 아닐는지….

 

함께 읽는 도덕경, 이는 읽고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함께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서로 인식하고 생각하고 또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아닐까 싶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