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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려도 괜찮아 - 개정판
노자 지음, 바이즈 옮김 / 바른북스 / 2022년 5월
평점 :
도는 비유하면 마치 골짜기 같아
나를 잃어버려도 괜찮아= 무아위 = (나, 내)가 없음, 나를 버리라. 그래야 자연스럽다
이 책<나를 잃어버려도 괜찮아>은 노자의 도덕경, 불과 5000 여자밖에 안 되는 글이지만, 역사 아래 “길”을 찾는 이들을 심히 괴롭힌 마의 숫자다. 김용옥, 최진석 선생 등 당대에 뛰어난 학자들이 풀이한 ‘도덕경’이 다는 아니다. 이 책을 펴낸 필명 바이즈 역시, 그 나름대로 도덕경 이해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중국 국무원 산하 구주출판사를 통해 중국에서 <무아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저본으로 삼았다.
옮긴이 바이즈는 도덕경은 어렵다는 것으로 글을 시작했다. 도덕경을 번역한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만큼 어렵고, 번역한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할 때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가장 큰 문제로 도덕경이 마치 한문의 천재, 한문의 소양이 있어야만 또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책으로 포장되고 왜곡됐다는 점 또한 지적했다. 그래서 아무나 ‘도덕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인 양 그렇게 인식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꺼풀을 벗겨보면 간단하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방향 또한 다양하다. 덕이란 길을 가는 법을 말하기에 이 또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 책은 편하게 노인(즉, 노자가) 말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풀어 단순, 명쾌하며 재치 있게 모른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아주 읽기 편하다. 무조건 편하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도덕경을 읽는 이유는 노자가 이야기한 내용이지 박학다식한 해설자의 해설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부처가 달을 가리키는데, 스님들은 모두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아니하고 부처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 책은 81꼭지로 돼 있다. 1의 도를 아십니까 에서는 노자가 정한 도, 무, 유, 현의 개념을 다룬다. 그리고 81에서는 내가 준 것이 바로 내가 받을 것이다 2를 논한다.
도덕경은 침묵의 경험이다. 이는 곧 명상이다
노자는 1장에서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억지로 표현하기 위해서 도(道)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도=길=과정=시작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할까?, 노자는 ‘덕(德)’이란 방법을 제시한다. 덕은 쌓는다는 것인데 무엇을 쌓는 것을 말함인가, 쌓는다는 것은 채우라는 것이고 정진하란 말도 된다. 즉 끊임없이 정진하라. 혹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인가 싶기도 하다.
도덕경 3장부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노자의 경험으로 체득한 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무위=무아위, 즉 에고(나)없이 행함을 말한다. 모든 행위에서 행위자인 ‘나’가 없으면 즉 나라는 관점과 이익, ~위하여가 없다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 내로남불처럼 ‘나’를 의식하면 욕심이 생기고,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게 된다. 강준만 선생의 지적처럼 권력을 잡기만 하면 사람이 바뀐다. 즉 뇌가 어떻게 되어버린다는 말인데, 이 말도 새겨보면 공익을 위하여 국민을 위하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지만, 국민이란 자리에 나, 내가 들어간 게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는 뇌가 바뀔 리 없지 않은가. 무위자연이란 바로 이런 이치겠거니 짐작해본다.
도에 대한 비유 3, “도는 비유하면 마치 골짜기 같아!”
“ ‘도’라는 것을 자연에 빗대어 본다면 아마도 골짜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어(중략) 깊고 생명력 넘치는 그 자연의 모습을 말이야, 한발 더 나아가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마치 검고 검은 미지의 만물의 어머니 같은 느낌말이야, 그것을 현빈(玄牝)이라 하자고, 바로 이곳에서 모든 것이 생겨나는 거야
모든 것이 끊임없이 존재하지만, 결코 억지로 힘들게 태어나는 것은 아니야. “(35~36쪽)
81. 내가 준 것이 바로 내가 받을 것이다2
노인이 말한다.
“내가 쓴 5000여 자의 글을 가까운 미래에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담아 더 많은 내용으로 이글을 해석할 것이라고” 그가 쓴 짧은 한 줄의 문장이 10마디로, 100마디로 늘어갈 것이라고,
사실, 내 말은 투박하고, 간결하고, 아름답지 않아, 또 교묘하게 뭔가를 설명한 것도 아니야.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고 장황하게 우주의 질서를 이야기한 것도 아니야. 난 분명코 내가 잘 모른다고 이야기했고, 사실 지금도 몰라. 또 나는 과거를 쌓거나 미래를 추구하며 살지 않아. 그저 현재에 머물 뿐이야. 지금, 이 순간에 말이야.
마지막으로 반복해서 한마디만 더 할게. ‘내가 준 것이 바로 내가 받을 것이다’ 이 말이라도 기억해주렴“(198~199쪽)
이 문장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준 것이 바로 내가 받을 것이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또한 해석이 분분할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준 것인지 뭘 준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고 감, 가는 말과 오는 말, 누군가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은 돌고 돌아 나에게도 다시 온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과학적 사고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지위를 묻는 책(앨런 라이트먼<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아이콤마, 2022)에서 문화와 모든 가치는 내 정신, 의식 속에서 존재할 뿐, 그 밖으로 나가면 가치가 없어진다. 즉 ‘무’에 가까이 가게 된다고. 여기에 더해 이 책을 펴낸 바이즈는 데이비드 호킨스의 ‘치유와 회복’이란 책의 한 구절을 적고 있는데, “의식은 자각을 통해 경험된다.”는 말이다. 모든 경험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무한한 의식의 에너지장을 통해 경험된다는 것이다. 즉, 의식 밖의 것은 무로 수렴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