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마쓰다 아오코 지음, 권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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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일본 문단의 페미니즘 작가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 마쓰다 아오코의 소설 <지속가능한 영혼의 이용>, 제목이 꽤 의미심장하다. 일본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형식을 빌린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 아니다 '아저씨가 사라진 세상에 관한 보고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아저씨(오야지)’와 ‘걸 그룹’ 이라는 두 축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발상이 신선하다. 혹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재한 고정관념이 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아저씨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소녀들

 

아저씨는 권력이다. 남성우월주의로 똘똘 뭉쳐, 사회 전체를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그 유지를 위해서 철저하게 여성들을 그림자 취급한다. 아저씨는 제1성, 여성은 제2성이다.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책 첫머리부터 가까운 미래 일본 사회에서는 ‘아저씨’들 눈에 ‘소녀’들이 보이지 않게 됐다. 이로 인해 소란이 일었다. ‘소녀’ ‘교복’으로 상징된 눈요기에 손대면 똑하고 터질 것 같은 물건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아저씨들에게 자리한 여성의 모습, 주인공 걸그룹을 좋아하는 30대 여성 게이코(敬子=늘 존중하는 사람)는 비정규직이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40대 아저씨가 치근덕거린다. 아주 영리하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또는 보이는 장면을 연출하여, 두 사람이 사귀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환경을 만들고, 심심하면 성희롱을 해댄다.

 

게이코는 회사에 이 남자를 인사과에 성희롱으로 신고한다. 결론은 아저씨가 만들어 낸, 착하고 일 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이미지에 남성이고 여성이고 모두 속아 넘어가고, 게이코는 한때 사귀다가 사이가 틀어져 복수하려는 무서운 여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분위기에 짓눌려 피하듯 회사를 떠난다.

 

'아저씨'들이 출퇴근 길에 지하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타자마자 찾는 것이 '교복' 입은 소녀다. 그 옆으로 바싹 다가가서 몸을 비벼대고(우리는 이런 사람을 변태라 부르겠지)…. 교복=함부로 해도 좋은 장난감, 교복은 학생을 표상하는 것으로 아끼고 우선 보호해야 할 대상음을 알리는 것, 아니다. 그들이 학생이기에 어리기에 소녀이기에 '아저씨'들은 느끼한 눈으로 전신을 훑고, 만지고….

 

회사는 통상직과 한정직으로 통상직은 말 그대로 성별이 없다. 일과 삶의 양립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단신 부임, 출장, 여성, 모성보호 이 모든 것이 없는 중성 집단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집단이다. 여기서 출세하면 여성의 모습을 한 남성 '아저씨'가 된다. 한정직은 대부분 지역 대부분 붙박이다. 이제는 이런 한정직은 비정규 계약직으로 대체한다. 한때 OL(오피스걸), 오차구미(사무실에서 차나 타 나르는)라 불렸던 여성들,

 

이 소설을 읽다가 떠오르는 책, 미켈라 무르지아의<아직도 그런 말을 하세요?>(비전코리아, 2022)-여자가 어디서, 남자가 말하는데 조용히 안 해, 어디 건방지게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겠다- 똑같다. 이탈리아의 남성우월주의자나 일본의 '아저씨'나 본질에서는 어쩌면 닮은 꼴인가,

 

 

 

게이코가 좋아하는 걸그룹, TV 화면 비칠 때의 모습과 다른 이미지들이다. 의상은 아저씨들이 환장하는 '교복', 생기발랄한 소녀들이라기보다는 훈련된 병사처럼…. 라이브쇼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들 뒤에서 프로듀싱을 하는 '아저씨'들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룹리더….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짚어내고 있다. 가네코의 동생 미호코와 그의 파트너 엠마, 캐나다에서 산다. 일본에서 살 때 미호코는 흐릿한 세상에서 침묵이 미덕이라는 숨이 막히는 통제 속에서 해방되고 싶어,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저 눈치로 때려잡는 암묵지 같은 것은 없다.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 일본의 남성우월주의에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캐나다로 도망한 여성, 영주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죽어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며,

 

지속가능한 영혼이 되려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집단의 부속품으로 흡수되는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닐 때는 이미 '영혼'이 없는 것이다. 고독한 군중,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성들이 '나는 혼자 있는 편이 더 강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그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등장인물들, 전직 걸그룹 멤버, 낳은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젖을 주는 여성들이 하나둘씩…. 혁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위가 없는 일본,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 무관심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들(아마도 이 대목은 지지 파파차리시의 <민주주의 그 너머>,뜰북, 2022를 함께 읽어보는 게 좋겠다)에 대해….

 

혁명

 

혁명은 절망을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저씨'가 움직이는 사회, 그 어디든 결과는 똑같다. 사회가 아저씨 손에 돌아가게 된 이상 여자아이는, 여성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아저씨'의 손과 눈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아저씨'가 정하지 않는 세계를, 아저씨가 사라진다면 사회구조를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아저씨는 멸종돼야 한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 일본은 깨끗이 사라졌다. 우리가 육체를 잃고 나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몸이 오롯이 제 것일 때, 육체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한국의 실정과도 딱 들어맞는다. 더 보면, 일란성쌍둥이처럼….

아저씨가 외국에 나가서 질펀하게 노는 꼴도 그렇고, 나이로 아저씨를 개념 짓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저씨, 오야지,

꼰대, 뉘앙스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결이 달라 보이기도….

아무튼 소설은 시원하다. 주인공 가네코의 울분과 절망 그렇지만, 걸그룹의 화려한 이면에 당차게 자신을 찾으려는 실마리를 찾아내 희망으로 이어가려는 것들,

 

우리가 육체를, 육체는 껍질이다. 성을 표징 하는 것, 여성이라서 받아야 하는 대우를 한 마디로 묶은 '여성스러움'이라는 아저씨의 규율과 음습한 법칙도 없어지고, 지속가능한 영혼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저씨' -일본여성작가5인의 <발칙한 그녀들>(작가와비평, 2022)-그들에 대한 저항은 100년 이상 이어져 왔다. 

이제 일본은 아저씨에 의한, 아저씨를 위한, 아저씨의 나라가 아니게 됐다.  

 

청소년청소녀들이 그리고 2030, 베이버부머들까지 이 책은 두루두루에게 각자의 느낌으로 다가설 듯하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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