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2.0 - 내 편만 옳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임지현.우찬제.이욱연 엮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안의 파시즘이 있음을…. 우리를 되돌아보자 한국 사회 구석구석을 보자


    민족 좌파의 친일파 색깔론이 반공 우파의 빨갱이 색깔론보다 낫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책<우리 안의 파시즘 2.0>


    2.0이란 말은 이미 파시즘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1999년 <당대비평> 특집 ‘우리 안의 파시즘’을, 그리고 이 책이 22년 후에 버전 업이 돼 나왔다. 당시 화두는 정치적 민주화에 만족하지 말고 사회적 민주화를 전면적으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 요지였다. 우리의 일상을 규율하는 미시권력의 문제를 짚어보고, 법과 제도, 구조와 일상을 전면적으로 민주화하자는 것은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의식이 바탕이 짙게 깔려있었다. 


    이 책은 지난 2021년 11월 ‘우리 안의 파시즘 2.0’ 학술대회에서 발표, 논의된 것들을 책으로 묶어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권력의 작동방식은 힘에 의한 강제와 억압에서 내면화된 규율과 동의를 통한 자발적 복종으로 이동했다. 권력의 작동방식은 합리화되었지만, 미증유의 코로나 19 재난 정국에서 벌어진 의학적 비상사태는 격리와 록다운, 집회 금지를 강제하는 위생독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얻어냈다. K 방역의 이면에는 586세대와 더불어민주당이 박정희 때나 했을 법한 비상사태를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우리 안 파시즘의 작동



    10명의 학자가 역사, 철학, 정치, 여성, 인종, 문화, 종교,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한국 사회를 톺아봤다. 



    일상적 파시즘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임지현이, 그리고 이철우는 ‘능력주의의 두 얼굴’에서 엘리트 독점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폭정을 초래했다고 봤다. 한때 민주시민 사회의 동력이었던 능력주의는 이제 기득권의 세습수단으로 변질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일으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확대하고 재생산했다고.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공정 담론의 바탕에 깔린 복잡한 구도를 이철승은 ‘세대-연공-인구 착종이 낳은 기득권’에서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퇴조를, 더 나아가 화석화를 우려하고 있다. 전투적 조합주의와 연공서열 고수 전략은 결국 586세대와 청년세대, 정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노동시장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대단히 씁쓸한 이야기지만, 경향신문, 시사인 등 보수, 진보 진영할 것이 줄 곳 다뤄온 문제들이기에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헤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주노조에 들어가는 자체가 특권이 되어간다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뜨거운 연대의 물결이 언제의 이야기일까 싶을 정도다. 그들은 노동귀족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건만, 어느덧 그 귀족 자리를 꿰차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정노동자, 정규나 비정규냐는 본래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안정된 일자리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없이 그저 세금이나 퍼부어대는 일자리는 아예 없애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해야만 유지될 수 있고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부조화들, 여성 혐오와 식민지 남성상, 인종주의 



    정치학자 박상훈의 글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정치’는 섬뜩하다. 주권독재라는 표현으로 권위주의적 긴급명령권을 강화함으로써 문재인 정권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 전반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비판한다. 직접민주주의 이름으로 국민 참여를 주도할 때 그 순간 바로 민주정치가 위험에 처한다는 경고, 나치즘을 주권독재라고 했던 독일의 나치시대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말이 여운을….


    20세대(이대남, 이대녀)의 문화 가운데 여성 혐오, 식민지 남성상이 교차하고 있음을 지적한 정희진의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서구중심의 역사주의 프레임 속에서 식민지 남성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 안 파시즘의 또 다른 장면, 바로 인종주의다. 우리 사회만큼 외국인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곳도 드물다. 출신 국가의 경제력이 그 사람을 대하는 잣대, 기준이 되니 말이다. 조영한은 한국인의 인종주의가 너무 습관적이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운 것이 돼버려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결속 강화되면서 국수로, 이른바 ‘국뽕’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정치교회, 문화교회



    그밖에 관종주의와 한 집 건너 하나씩 들어서는 교회, 누군가 농담스레 뼈있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남산에서 시내로 돌을 던지면, 김씨, 이씨, 박씨 중의 하나는 맞을 거라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교회의 첨탑이 그리 많지 않았는지, 교회 이야기는 없었다. 우후죽순처럼 특히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원도심과 신도심이 어울리지 않는 공간 속, 연결점은 교회 건물들이다. 아무튼, 대형교회를 줄 곳 비판해 온 목회자 김진호는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에서 개발독재 시대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겨 대중의 자발적 동원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정치종교, 소비시대 자신의 결핍감을 소수의 다른 이에 대한 혐오감으로 푸는 문화 종교를 구분 지어 설명한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성장기의 뿌리는 남북분단에 기원한다. 서북 출신의 반공주의자들 종교인들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얻어가면서, 하나의 종교 권력으로…. 연일 끊이지 않는 불협화음들, 이 또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우리의 행진곡 안에 자리한 식민지성



    음악학자 배묘정이 말하는 우리 안의 행진곡과 소리의 식민성은 그간 둔감해진 분별력을 일깨운다. 우리 사회는 일본강점기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신체와 감각에 내면화된 행진곡의 리듬이 개발독재를 거쳐 지금까지 강화되어왔다고 지적한다. 소리의 식민지성을 파시즘적 속성을….


    민주주의는 점점 퇴화해가는데, 우리 안의 파시즘만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부패 권력, 독재체제에 대항했던 그들 역시 파시즘의 싹을 안고 있었다. 독재냐 민주냐 하던 시절에는 내 편만 옳다고 주장해야 민주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세상은 바뀌고 청년 386세대가 586세대가 되어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들이 그렇게 비판해대던 정치의 비민주와 독재를, 이제 그들이 주체가 되어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가고 있다. 이제는 그들이 타도대상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언제나 돼야 그들이 말한 좋은 세상이 올 것인가, 시계열적 순차론은 없다. 동시에 함께 이뤄져야 한다. 성숙한 사회에서 정치 권력이든 경제든, 문화든 그 모든 것들을 규율하는 잣대는 ‘우리 안의 파시즘’은 없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보기에 따라서는 분명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가 있고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있다.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시대의 소리를 듣는 것이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한 파시즘이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