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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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2월 31일이다그러나 새삼스레 한 해를 돌아보며 열정적인 후회를 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민망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나이를 곱씹으며 과장한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 한다아마도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그러니 마찬가지로 한 해를 보내며 읽어야 할 마지막 책이라며 호들갑 또한 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며칠 전 터미널 앞 카페통유리로 된 창가에 앉아서 이 책을 읽었다부러 장소를 선정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아니나 읽다보니 이보다 더 적합한 순간이 있을까 낯선 감탄이 일었다. 12스산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출입문으로 새어들어오고 먼지처럼 내리는 눈발을 간간이 내다보며 읽은 책은 소설가 손흥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첫 챕터를 읽은 후 책의 앞날개로 돌아가 작가의 나이를 돌아본다. 1975년 생한참 젊은 나이다이문구와 오정희. 처음 떠올린 것은 둘이었고 그 다음엔 지금은 신축으로 공사한 옛날 큰아버지 댁이었다소와 여물이 있고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던, 그래서 언니가 가기 싫어했던 집이었다기껏해야 우리가 그 집에 가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많으면 세 번이었음에도 그 냄새와 마당의 진흙과 예쁜 눈을 가졌던 소의 눈은 여전히 기억이 된다외갓집은 그보다 나았다꽃이 있고 털이 하얀 강아지가 있었고 할아버지의 자전거와 호미 같은 것들이 널려 있는 곳엔 어린 사촌동생이 타던 낮은 장난감 자전거도 있었다. 어떤 것들은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그리고 문득 어떤 냄새공기날씨를 보며 그 날을 떠올리게 된다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아스라한 향수정확히는 거기 있었던 지도 몰랐던 어린 날의 어떤 지점을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다


우르슬라에 비유한 고모의 죽음이나 그녀들의 아들들과 딸할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 함께 소의 궁둥이를 밀어 트럭으로 싣고 장에 나갔다가 소머리국밥을 먹고 온 일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이견과 그 사이에서 시소를 타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태도와 외동의 난감함 같은 것건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산수유와 감옥에 갔던 일과 하다못해 이스탄불에 체류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작가에겐 오래된, 빛 바랜 냄새가 났다. 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도시에 대해 쓰는 작가들은 차고 넘치고 특히 젊은 작가들은 대부분 도시의 삶과 그 진절머리에 천착한 이야기를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마흔 다섯(내일이 새해라는 것을 감안, 한 살을 높임을 사과한다)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어린시절과 자신의 삶에는 갖은 냄새와 촉감과 추억인지 향수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했다. 그게 낯설었고 동시에 신선했으며 조금 부끄럽게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아마도 넛할아버지는 아직도 캄캄했을 새벽에 집을 나섰을테고 초겨울 짧은 해가 지고도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야 그 집으로 돌아갔을 테다오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오직 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손등 한 번 쓸어보기 위해 다니는 이 없어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곶감을 지게에 지고 걸어왔을 넛할아버지.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러나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니, 사실 겨울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평생을 기척도 없이 살다 가신 분인지라 강렬한 기억이 생전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이 문득문득 미안하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숨을 쉬는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분의 삶의 태도같았던 날숨과 뻣뻣하게 자란 하얀 머리와 막내딸과 손녀를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이 잠시 흐른 뒤 춥지 않느냐, 밥은 먹었느냐 묻던. 그리고 이제는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가족들 중 누구도 보지 못한 저 먼 곳에 걸린 현수막도 읽을 수 있는 시력으로 굳어가는 다리 때문에 집 밖으로는 혼자 나가지 못하는 분. 옆에 놓인 고무나무 화분처럼 해가 있는 곳에서 늘 바깥만 바라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비죽 눈물이 나온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신기한 일 중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해선 한없이 메말라있는데 어떤 부분에선 믿을 수 없게 눈물이 쉽게 나온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다. 그 책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필멸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못내 서럽다.

 

문학은 언제나 가망이 없었을 따름이며 문학을 죽음 직전에서 일으켜세우는 건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나의 환멸은 뿌리가 깊다. 어쩌면 그해를 지나쳐 더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학이 무언지 모르던 시절까지 혹은 문학이 생겨나기 전에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이 없는 그곳에 이르면 아마도 누군가는 기어이 그곳에서 문학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묵새기고 앉아 문학을 이야기할 것이며 설령 벽도 천장도 없는 벌판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혹은 오르지 별과 달만이 머리 위에 빛나고 있을지라도 그 별과 달을 쓰기 위해 기꺼이 고독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알게 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

 

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남김없이 쓴다 해도 결코 완전하게 쓸 수 없으리라는, 아무리 적게 쓴다 해도 너무 많이 쓰게 되리라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이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글을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으리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편의 글이 완전하다면 그 이유는 글 자체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해서가 아니라 글의 틈이나 군더더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소거하며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고작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그것으로 충분하겠냐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그 수동적인 행위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힐난도 해보고 적당히 구슬려도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도무지 나는 대답이 없었다. 자주 그러했다. 더 완벽한 때를 기다린다는 신중함을 방패 삼아 게으름을 정당화했고 어차피 안 되었을거란 불분명한 절망을 근거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허나 열심히, 꾸준히 쓰는 사람들 앞에서 늘 똑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죽는 것이 서러울 것 같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터키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오르한 파묵이 아니라 아지즈 네신이라고 말하는 작가를 앞에 두고 어찌할 바 없이 12월에 멈춰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무척 불편했던 영화를 만든 작품의 신작 포스터를 보고서 나쁜 작품을 쓰는 것보다는 나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계절이 있었다. 그 때부터 작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것도 아니고 등단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그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견디는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그런 해였다. 여전히 문장은 헤지고 형편없지만, 쓰고자 하는 욕심의 절반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룩거리면서도 무언가를 썼다는, 도마뱀의 꼬리보다도 짧은 안도감. 작가가 쓰는 소설가의 일, 문학의 자격, 쓴다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좋은 문장을 쓰는, 이처럼 편안하게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것 같은 글을 쓰는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내 고민 따위는 너무도 당연하다.


기꺼이 나이를 떠올리지 않고 지난 해를 후회하고 앞날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실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것을 가까스로 인정하면서 어쩌면 작위적인 태도보다도 지금 이 인정이 나이를 먹는다는 진짜 물증일수도 있겠다. 그래 12월은 어쩔 수 없이 향수와 서글픔과 울음의 계절인가보다. 그리고 겨울을 관통하는 이 시기에, 따뜻한 차 한잔과 조금의 눈물과 함께 이 책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12월 31일이다. 또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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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Shining 2019-01-03 09:41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 늦었죠ㅠㅠ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많이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요 :D

2019-02-02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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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해야 할, 반드시 필독해야 하는, 한 번은 봐야 할 등등의 표현을 싫어한다. 강요를 하면 더 하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가끔 영화나 책을 읽으며 특정 타깃층을 겨냥해 쓸 때가 있다. 이런 식이다. 영화학도라면 혹은 시네필이라면 아마도 좋아할 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영화자서전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물론 만족스러울 것 같지만 특히 영상연출을 다루는 사람들에겐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영화자서전이라는 표현이 돋보이는데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개인사 등은 배제하고 자신이 만든 영화(와 영상)의 이야기만을 다룬 게 인상적이다. 아마도 원고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기억을 기반하여 현재에 썼을텐데도 정말 1995년이나 2005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더 진심으로 담은, 귀한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 영화의 집필 시기가 달라지는 만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고 딸이 태어나는 등의 이야기가 가끔 더해질 때) 그의 영화가 그러하고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오스 야스지로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배제했지만 돈과 투자영화제와 시상은 물론 자국의 상황과 비판도 빼곡이 들어있기에 영화 바깥에 이야기에 주목해도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처음엔 자신 역시 서툴렀고 어렸지만(그런데 허오 샤오시엔과 이미 알았던 사이... 지아장커와 사진 찍으신 분...) 영화제란 마켓이기 때문에 에이전트와 단합해서 공략을 해야 한다는 것과 3대 영화제 등의 장점과 특징에 대해서도 서술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그 중에서 한국의 이야기도 몇 번 등장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와 연혁은 물론 외압으로 인한 문제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데다 심지어 지지성명도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게다가 한국의 영화학교나 영화아카데미외국으로 진출한 감독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영화산업을 꽤 중요시하며 착실히 발달하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놀랍다.

 

한국영화의 위기론은 언제고 대두되고 개인적으론 근래 2,3년 간 절실히 느끼지만 그런 우리나라의 실정도 일본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애니메이션 아니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만이 남아서 일본배우들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 출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지칭하며 현재 일본에서 유일하게 영화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하는 평도 들었었다단순히 영화제에 진출하고 상을 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일본에서 영화가 얼마나 사양길에 들었는지를 들었었지만 이렇게 일본의 감독에게서 들으니 또 남다르다(하긴나만 해도 한 때는 구로사와 아키라미조구치 겐지오즈 야스지로오시마 나기사이마무라 쇼헤이구로사와 기요시미이케 다카시이와이 슌지 등의 영화를 봤지만 요샌 ......정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만 봤다그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오기가미 나오코와 나카시마 테츠야 정도였나). 


이를테면 제 어머니가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전쟁은 도쿄 대공습뿐이었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타이완과 한국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걸그랬다면 지금쯤은......” 하고 주눅 들지도 않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는 명백히 피해 감정밖에 없습니다.

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아버지는 식민지 타이완에서 나고 자랐는데타이완 시절의 행복했던 청춘가 이야기와 중국에서 패전을 맞이하며 시베리아로 억류되어 강제노동을 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습니다그 사이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본인이 무엇을 했는지)는 결국 말하지 않았습니다개인의 수준이 이러니 당연히 일본사 자체도 그런 형태를 취하겠지요. ‘가해의 기억은 없던 셈 치거나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라고 정색하거나 불문에 부칩니다즉 나라 전체가 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작품 제목으로 붙인 망각은 그런 점을 가리킵니다헌법 제9조는 대담하게 말하면 성서에서의 원죄가 아닐까요요컨대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에 대한 일종의 쐐기로우리가 항상 죄의식을 자각하며 전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아닐까요(중략그러니 야스쿠니 신사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라고 아무리 말한들 국제적으로 이해받기 어렵습니다적어도 어쩌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을지도 모를 중국인과 한국인은 당사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011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일이며 일본의 역사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담은 부분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말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이야기들에 집중하고 있다. 어떤 영화를 무슨 생각에서 생각에서부터 시작했고 어떻게 살을 더했는지. 투자를 받은 곳과 어째서 제작이 늦어졌는지. 캐스팅은 누구를 만나 누구를 소개받고 어디에서 보고 누구를 원했는지 등등.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해, 책을 쓴 시점에선 아직 영화화 되지 않은 <세 번째 살인><어느 가족>을 제외한 모든 영화의 비하인드가 꼼꼼하게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도중 더해진 사건이나 시간으로 인해 바뀐 설정은 물론 장소 섭외와 콘티까지 빼놓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아무도 모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의 경우에 아이들의 어떤 모습이 캐스팅과 시나리오로 이어졌는지도 꽤 상세히 써놓았다.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전공으로 삼았던 사람인지라 픽션을 연출할 때 어느 정도의 간섭과 작위가 허용되는지는 물론 피사체에 대한 예의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곱씹게 만들기도 하고 그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 때 느꼈던 것들을 다음 영화에 좀 더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취가 있었다는 단단한 소감도 읽을 수 있다(ㅇㅇ작품은 실패했습니다, 라고 본인은 느꼈지만 주변에서 조언하길 ㅇㅇ영화를 함께한 배우, 스탭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가 된다는 말을 듣고 수긍했다는 것도 재밌다. 그러더니 20년이 지난 영화이니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요?라고 하는 것 또한). 이쯤 되면 거의 영업 비밀을 다 담은 셈인데 이걸 읽는다 해도 그만큼 영화를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감독의 팬이라거나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이 책이 즐겁겠지만 만약 전작을 다 보지 못했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내 경우에도 감독이 다큐멘터리 PD출신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던데다 <디스턴스>와 <태풍이 지나가고>는 아직 보지 못했고 <공기인형>과 <하나>역시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때문에 아직 보지 않은 두 영화의 챕터는 읽지 않았고 보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인지 텍스트만으로 화면을 전달받기 어려워서인지 TV드라마의 에피소드도 상대적으로 가볍게 읽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 그 외의 이야기들, 어쩌면 몇 개의 챕터만으로도 분명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에 말했듯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꼭 봐야 할 영화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라면 한 번쯤 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고 영화를 봤다면 이 책 역시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리라 지레 짐작해본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누가 옳고 그르다든가,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든가, 아이를 둘러싼 법률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나 교훈이나 제언이 아닙니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을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모놀로그)이 아닌 대화(다이얼로그)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제가 원했던 건 이러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통상적인 픽션 연출에서는 드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현장에서 발견한 대상과의 거리를 잡는 방법이자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법이고, 취재자로서의 윤리적 자세입니다. (중략) 그 시도는 마지막까 제대로 관철했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도 모른다> 챕터 중 

 

자잘한 디테일은 그다음에 채워 나갔습니다. 가령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나온다면 어머니가 심술궂게 트는 것일 테니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겠지...... 라든가, 식사를 한다면 모처럼이니 내가 좋아했던 옥수수튀김으로 할까 등등. , 먹는 장면은 밤의 장어 요리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요리를 하거나 치우는 장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편이 등장인물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사 장면에서는 먹는 것보다 준비와 정리가 중요하단느 점은 무코다 구니코 씨의 흠드라마에서 배웠습니다.     - <걸어도 걸어도> 챕터 중 

 

이처럼 저의 경우, 주제는 찍기 전에 아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자잘한 디테일을 채워 나가는 가운데 생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주제나 메시지는 저 자신이 의식하고 있을 뿐이라서 인터뷰할 때도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품에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나 생각하는 게 반영되어 있을 테니 구태여 말로 표현함으로써 제가 파악하고 있는 부분 외의 주제나 메시지가 버려지는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재는 채워지는가. 채워지지 않는가.

 

제 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실을 그린다는 말을 듣지만. 저 자신은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덧) 좋아하는 영화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겁지만 그 화자가 창작자 본인인데다 불편한 자만심이나 공허한 자기혐오, 공연한 자기연민이 배어있지 않은 어조라 인상적인 한편 읽는데 부담이 적었다. 게다가 읽고 나면 필연적으로 영화가 궁금해진다. 궁극의 셀프 세일즈이자 영화자서전이란 말이 딱이다. 혹 이 글을 읽고 한 명이라도 더 영화가 보고 싶어질까 싶어 열심히 스틸컷을 업어왔다. 나는 팔게 없어 나 대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팔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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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2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9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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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마치 필연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중첩된 우연이 특정한 정조나 감흥을 더 깊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다. 예컨대 일어난 순서는 이러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봤다.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에겐 하나뿐인 딸 테스와 사위인 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월터가 있다. 월터는 인공지능인 만큼- 테스와 존의 이야기로부터 마조리의 추억을 마치 월터 자신의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라고 늘 완벽한 건 아니다. 때문에 그는 마조리가 그 대신 ~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음번엔 마치 그녀와 그의 기억처럼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인공지능 월터는 전적으로 마조리를 수반하기 위해 존재할뿐더러 그에게 정보를 주는 존 역시 사위인지라 애초 존의 진술조차 완벽하진 않기 때문이다. 월터와 마조리에게 있었던 진짜 일들은 두 사람의 기억속에만 남아 있으므로. 연극을 원작으로 했다는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막과 장으로 구분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인공지능의 모습은 월터에서 마조리, 다시 테스의 모습을 갖는다. 진짜월터와 마조리, 테스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모습을 갖고 대화를 하고 기억을 완전하게 나누는 식이다. 노쇠한 존의 모습과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우리(관객)는 비단 치매를 앓는 마조리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억이 조금씩은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포즈의 그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인줄은 알았으나 그게 극장도 아닌, 모텔에서 TV로 본 영화라는 것은 몰랐다. 마찬가지로 마조리가 확신하며 말하던, 사프란색 행진은 벤치에서 본 것이 아니라 TV 속 화면이었다. 때문에 기억이란, 결코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관건은 기억의 온전함이 아닌 그 기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이 달라져도, 기억의 디테일이 사라졌다 해서 그 감정마저 거짓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기억이란, 사랑이고 관계며 상처와 원망이란 그렇게 깊고 깊고 어려웠다.

 

영화를 본 다음날에 친구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그녀가 멀리서 오느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절반쯤 읽었을 때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오랜만이라 혹시라도 어색하지 않을까 내심은 염려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화는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 날 밤의 공기처럼, 앤틱한 가게에서 흐르던 재즈팝처럼. 하지만 안녕을 고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설명하기 힘든 공허감을 느꼈다. 버스 유리창에 기대서 우리가 나이를 들었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와 같이 냉소적이었으나 좀 더 어릴 때 가졌던 뜨겁고 열정적인 비관이 아닌 노인의 한숨 같은 체념을 품고 있었고 올 초에 힘든 일이 많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그녀는 이제 흘러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1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불편했는데 이제 그녀는 내일 출근할 이야기와 돌아올 휴가에 대한 기대 외엔 지난한 관계에 대한 고민과 미련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도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날에 품었던, 그 광막한 외로움이 뭔지를 알 것 같았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때로는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원제 Levels of Life)는 지극한 러브 스토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여타 다른 책들이 그랬듯 이 책 역시 처음부터 그 맥락을 드러내진 않는다. 엄청나게 거시적인, 달리 말해 전혀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줄곧 꺼낸다. 두 번씩이나. 나다르와 베르나르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지만 그게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갸우뚱해질 무렵, 세 번째 변주가 등장한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땅에 있는 기구가 땅을 밀어내고 하늘 위로 오르듯이, 그도 아니면 반대로 하늘에 있던 열기구가 천천히 하강하듯이, 삶의 층위라는 제목처럼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위치가 필요했나보다. 쓰라는 독후감 대신 영화와 친구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글의 본심처럼 말이다(그렇다고 감히 나와 작가를 동일시함은 절대 아니다).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은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거소가,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구성처럼, 마치 연극처럼 장과 막이 나뉜 글 역시 뒤로 넘기다보면 본의를 알게 된다. 초반에 난해해보이는 난삽해보이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별한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상실에 대한 지긋한 상처의 기록이며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 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그녀는 늙는다는 개념을 증오했다. 이십대부터 자신이 마흔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이어나갈 삶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기를, 함께하는 옛 추억들이 늘어나기를 고대했다.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주제가 결혼으로 흘러갔을 때, 이마저도 우리가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했다. 더 이상 비장하거나 불안한 투가 아닌 덤덤하고 여상한 어투로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이야기, 대체로 유아적인 남편과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와 험난한 세상과 가족의 굴레와 무게에 대해서도 말을 나눴지만 결정적으로누군가와 함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공간을 나눠 쓰고, 생활방식을 타협하고, 배려하고 배워가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들. 가족과도 오랜 시간을 들여 타협했고, 여전히 맞지 않은 부분이 산재해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과 함께 집을, 방과 침대를 나눠 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에 대한 탄식을 나란히 뱉었고 때문에 결혼이란 무모한게 아니라 용감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줄리언 반스는 (우리가 생각한) 용감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즐거워했던 것은 스스로가 앞서 말한, 생활공간을 나눠 쓰는 등의- 결혼생활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아내와 하는 결혼생활을 아꼈고 거기서 활력과 안정을 얻었다. 때문에 상실 이후는 더더욱 힘겹다. 그를 위로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해보라며 권하기도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나 여태까지의 일상을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일들을 아내와 함께 하는 것, 혹은 혼자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아내에게 설명하고 조언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없이 하는 일을 즐겁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사별의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부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 하나를 들어보자.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별의 아픔, 상실을 이렇게 이성적으로, 자신의 슬픔의 단계와 감정을 분석해서 쓴 글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놀랍게도 세상에는 자신의 슬픔도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에겐 단계와 층위와 해부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작가가 그렇다고 단정지으려는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해서 더 괜찮은 건 아니다. 작가는 중간중간 자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단 이야기를 한다. 어조가 담담해서 마치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 진심일 거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떠나간 아내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며 자신마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내의 기억도 소실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죽음 자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보다 유실된 기억과 사라지는 존재감이 두려워서 죽음을 거두는 마음이라니, 상상하기가 어렵다전날 본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과 그날의 분위기,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억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대단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잔인한 거짓의 파편이기도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드러났던 선의의 거짓말과 어긋난 기억을 듣다 보면, 아내를 담고 있는 자신마저 떠나는 것이 두렵다는 작가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한다.

 

진단이 내려진 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는 37일이 걸렸다. 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회피하는 법 없이 늘 직시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미친 사람의 지혜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거의 매일 밤 병원을 나서면, 그냥 하루 일과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내가 분한 마음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어쩌면 저렇게 게으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기들의 무심한 옆얼굴을 여보란 듯 보여주고 있단 말인가. 세상이 이제 이렇게 변하려는 참인데.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사별의 고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와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모습조차 사람들은 요즘 좋아 보인다며 인사를 건넸고 옛말에 남의 말도 석 달이란 말이 맞긴 한지, 있었던 일을 잊고 같이 여행을 가자며 조르는 사람이 신기했다. 머릿속 한 편으론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인지, 영화에선 툭하면 행성이 부딪히고 외계인이 불시착하던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돌아오는 길에 그리도 우울했었나보다. 있는 힘껏 아끼거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도 열정을 다해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 상태가 평화로운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세상을 살리는 일, 달이 차고 저무는 일에는 관심도 없는 분노에 찬 상실감을 겪는 작가보다 내 자신이 더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화를 내거나 슬픔을 느낀다는 일들도 기실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집에 거의 다 와서 택시기사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즐겁고 뻔했다. 그러다 마침내 치고 들어오는 경쾌한 질문.

아내 분은 주무시고 있겠네요?”

말없이 감정을 억누른 끝에 나는 가까스로 찾아낸 유일한 말로 답했다.

그러면 좋겠네요.”

 

이제껏 하나였던 적이 없었던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그리고 하나였던 것을 둘로 쪼개는 것.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둘의 공통점은 용감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했던 것처럼, 열기구를 타고 정확하지 않은 하늘의 틈을 헤치며 날아오르듯, 두 사람이 결합하는 과정과 서로를 잃는 것, 그 후에도 계속 묵묵히 살아가는 것 역시 내게는 똑같이 지극히 용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용감한 사람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랑을 안고 살아가는 모두의 밤과 낮이 오늘도 평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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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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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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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백 번 정도 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개인사를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애정에 눈이 가려지기 마련이고 헌데 인간이란 본디 얼마정도는 서로를 실망시키니. 혼자만의 믿음이 깨지거나 바닥없이 아스라한 배신감에 시달리다보면 가능한 한 사적인 부분을 눈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잘 되진 않지만 꾸준히 시도한다. 배우는 캐릭터로, 작가는 오로지 완성한 글로 판단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이 책은 그런 원칙의 면에서 적합하다. 번역가가 이야기해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개인사가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써내려간 의도나 의중에 대해서일뿐 그들의 성격이나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번역가가 자신이 만난 작가들에 대해서 써낸 에세이로 분류되긴 하나 예상 이상으로 평론적이며 다소 학술적인 접근법을 갖춘 책이다. 일부 발췌한 문단을 빌려오면 이러하다.

 

그는 1959년 첫 장편 구빈원 축제로 미국 예술원 로즌솔상을 수상했고, 이십대 후반인 1960년에 달려라, 토끼를 출간하여 그 세대의 대표 작가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인 1963년에는 켄타우로스로 전미도서상을 받고, 1964년에는 최연소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업다이크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다이크가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평생 우려먹는 작가였다는 뜻은 아니다(업다이크 자신은 불가리아 여자 시인에서 베크의 입을 빌려 그런 자화상을 슬쩍 그려내기도 하지만). 상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십대에 들어선 1981년에는 토끼는 부자다로 퓰리처상, 육십대에 들어선 1991년에는 토끼 잠들다로 다시 퓰리처상을 받았다(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작가는 업다이크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세 명 뿐이다). 토끼는 부자다를 발표한 직후인 1982년에 타임은 업다이크를 두 번째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는데, 이때 표제가 오십 세에 위대해지다였다.

 

(중략) 업다이크는 상복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68년에 발표한 커플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 젊은 시절 잠깐 시민권 운동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국가기구와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미소 문화교류 문화사절로 동구를 순회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화적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나보코프가 영화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앞이 보이지 않는 알비누스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영화로 본다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을 쓰던 시점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영화와 소리의 결합(1929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상투적 수법이 된 지 오래지만, 오나전한 암흑 속에서 소리만 들려줄 때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알바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현장을 나보코프가 무대 지시 사항이라는 말을 앞세워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러 해석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영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은 플롯의 전개 속도, 또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딱 영화로 만들기 좋게 짜인 플롯과 대사이고, 그런 면에서는 오늘날의 대중소설과 흡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영화적이라는 평이다.

 

앞서 밴빌이 조이스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밴빌은 가디언과 이야기하면서 모든 아일랜드 작가는 조이스 추종자와 베케트 추종자로 나뉘는데, 자신은 베케트 진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특히 아일랜드 내에서 밴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가 능력으로 보나 성취로 보나 베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존 업다이크의 수상경력과 이력, 상업적 성취에 대한 정보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향한 대략적인 중평, 밴빌 자신의 발언과 밴빌을 향한 발언을 인용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태도나 의견은 숨기는 편이다(물론 이런 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자체가 저자가 그러한 논조에 동조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나). 가능한 한 독자에게 사실만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인상적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의 호와 불호는 나뉠 수도 있겠다. 재밌는 건 출판사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짐작이다. 번역서 외에는 책을 내지 않은 저자가 이 책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두 권을 동시에 발표했다. 물론 같은 출판사다. 공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벼운 에세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저자의 번역 원칙 등이 궁금하다면 다른 한 권을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의 이야기도 겻들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번역과 관련된 그의 생각 일부를 읽을 수 있는데다 작가들의 이야기 중에도 문득 자신의 의견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이런 식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 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척하는 삶에서 끝애와 하타가 기대하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사십대로 들어선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이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를 관찰한다. 공항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지만, 왠지 노스탤지어도 묻어나는 듯하다.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중략) 사실 나 자신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들이 너무 자신의 내부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이런 느낌은 알랭 드 보통과 나의 나이 차이, 즉 서로 속해 있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p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와서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려,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는 외부에 대한 관찰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지점에 이른 듯하다.

 

매카시가 긴 은둔 기간을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보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하니 궁핍도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거의 팔 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했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학에 와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자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뒤로 일주일 동안은 또 콩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라는 것이 매카시의 말이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나곤 했다(한번은 코카콜라가 지원금을 주었다고 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사가 사라진 로드의 흑백의 세계에 빨간 코카콜라 캔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것이 그런 인연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일화 중심이고 의견을 표명할 때 마저 꽤 조심스러운 태도다(알랭 드 보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저자의 생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 같다). 일각에선 남의 이야기를 빌어온 것처럼 신중하다못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는 저자로서, 특히 자신이 만난 작가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깃든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나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별개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겐 일종의 길티플레져 역할을 할 수 있다.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고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결하고 있으니. 

 

저자가 워낙 유명한 번역가인데다 걸출한 작가들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책에 인용된 작가의 목록만 봐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독자도 많을 거다. 책을 좋아한다면 아마 이 중 적어도 한 명쯤은 좋아할 게 분명하고 작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본 책이 한 권 이상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저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이 흥미롭지 않기 어렵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필연적으로 이 안에 들어있는 작가들, 그들의 책을 더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니 짓궂게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기홍보 수단이 어딨으랴(작가와 독자 사이의 연결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선 번역의 본질과도 비슷한 책이니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가 -번역책으로 만났을 때도 느꼈듯이- 글을 잘 쓰는 문장가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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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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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한 때는 질리지도 않고 많이, 열심히 읽었다. 재밌는 것은 재밌는 대로, 재미가 없다 해도 없는 만큼, 좋은 것은 좋되 별로인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자세였던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고 또 여리고 유연했던 시기여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제는 더는 그런 식으로책을 읽지 않는다.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그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일테면 사람의 일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의 생애서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간 셈이다.

 

내게 다수의 일본 소설들은 그런 시기가 되어 과거가 되어버렸다. 한 때는 그런 정서들을 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서로의 날것을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되고, 생활력이 결여된, 그림처럼 아름다운 관계들. 헤어진 연인 사이에도 더없이 무던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지 않고 친구라도 와나타베와 미도리처럼(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들) 지낼 수 있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연하고 미니멀한 삶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에 할퀴어지고 나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쿨한 관계란 생각해보면 거기까지인 사이일 수도 있다는 것, 헤어진 연인은 결코 쿨할 수 없고 가족이란 본디 애와 증사이에서 줄다리를 타기 마련이며 와나타베와 미도리는 결국 친구가 아니었고 에쿠니 가오리의 주인공들은 불륜마저 쿨하다고 여기며 상대가 나를 돌아봐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에게 상처를 줘놓고 자기연민으로 칭얼거리며 그 와중에도 일은 안 하고 고양이나 껴안고 사는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삶은 대체로 그런 식인 것 같다. 좋으니까 싫어지고 좋은 점이 견딜 수 없어지며 더없이 미워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앞두니 감회가 새로워 서두가 길었다. 가느다랗고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옆으로 땋아서 묶고 에스닉한 셔츠와 펠트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낡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녀. 요시모토 바나나를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책을 열었는데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쓴 웃음이 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반가웠다.

 

나는 지금도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다만 장난으로 하는 놀이가 아니다. 높은 벼랑 위에서 물을 향해 뛰어내리는 아이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푹 빠진 놀이다.

 

주인공 이름은 사야카. 남편인 사토루가 세상을 떠난 후 딸인 미치루와 함께 지낸다. 1층에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사신다. 어느 날 이전에 이 곳에 살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는데 이야기인즉슨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지금의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마당에 소중한 뭔가를 묻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말이라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혹 괜찮다면 방문을 해서 그 곳의 땅을 파도 되겠냐는 부탁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독특한 일이 생기네 하고 말겠지만 편지의 발신인이 오래전, 사야카가 스무살에 사귀었던 남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야카는 산사인 그의 집에서 함께 산 적도 있고 가족들도 모두 알았다. 당연히 돌아가셨다는 그의 어머니도. 한 때는 결혼까지 생각했던 진지한 사이였으나 모종의 사건이 발생해 그(이치로)와 그의 가족들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믿기지 않을 우연의 일치로 그와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야카는 일본인이긴 하나 발리에서 쭉 살았다. 문화인류학자인 부모님을 여의었기에 가족이나 형제도 없고 정해진 거처도 없다. 그리고 그녀에겐 이른바- 사이코메트리와 같은 초능력 비슷한 재능이 있다. 그녀의 결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정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었던 사토루가 시한부를 선고받자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정확히는 아이를 낳아달라고.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토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고, 그의 아이를 낳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둘은 일종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심지어 사토루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다 듣고도 그녀를 기꺼이 집안으로 들인다.

 

다소 비일반적인 설정과 상황이 펼쳐짐에도 이상하다는 생각보단 이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언제나 그랬다. 분명히 일상적인 이야기 임에도 오컬트 요소를 넣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말갛고 상냥한 남자주인공과 다정하고 너그럽고 강한, 진짜 어른이 등장한다. 대개는 할머니나 어머니, 이모 등으로. 여기선 사토루의 엄마이자 사야카의 시어머니가 그러하다.

 

네 손,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아팠겠구나.”

시어머니가 놀란 표정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책임이나 상처나 장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아니라.

 

“(전략) 우붓에 가면 멋진 그림도 사 오고. 새와 숲이 있는 걸로. 현관에 걸어 두련다. 우리 집에서는 잘 없던 일이지, 그림을 걸어 둔다는 거, 즐겁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왜 없어진다고 그래.”

나는 도무지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시어머니가 전부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려 깊고 현명하다. 아들을 보냈지만 미치루와 함께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사야카는 부모님처럼 사랑한다. 이 이상한 결혼을 받아들여준 것도 사토루와 사야카가 모르는, 혹은 눈치 채지 못한 점 덕이었다. 아들의 따뜻한 표정, 친구였던 사람의 아이를 낳겠다는 사야카의 결정. 이들 부부는 타이밍이 어긋난, 늦된 사랑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가 있고 이들의 사랑이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거리를 뒀기 때문에 서로를 나무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치로의 편지를 받은 사야카는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를 마주하고 후회를 접고 미련을 청산하고. 임신을 하고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를 안으면서도 변화하고 성장했던 그녀는 이제 완전한 탈피를 한다. 젊었던, 어렸던 시절을 묻어두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단순하지만 묵직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서로의 옆에 선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미치루의 엄마로 사는 일, 남편을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만족하지만. 이들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의 스웨터와 가방 같은 것들이 되어 늘 따라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했던 시절.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첫사랑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문득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플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가 품은 사물이 되고 싶을만큼 강렬하게 뭔가를 염원했던 적이 있긴 했나. 아니지. 분명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었던, 지금보다 어리고 여리고 유연했던 나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땐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이 내게 유효하게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반갑다는 마음이 든다. 늙고 낡고 시니컬한 나에겐 더 이상 아름답거나 주효할 수 없는 사야카의 사랑과 삶,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과거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겐 충분히 반짝거리는, 멋진 이야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어떤 시절과 시기를 지나는 이에게 이 책이 더욱 아름답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작가 아직도 글을 쓰는구나' 하고 발견할 수 있고 '변하지 않았네'하는 아쉬움과 반가움이 공존할 수 있도록 요시모토 바나나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요시모토 바나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된 시기를 되짚어 보면 어떤 이는 옛날의 내가 읽던 그녀의 책을 보며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신기하다.


어떤 책들은 기억 속에서 계절과 함께 박제된다. 지르르르 귀가 얼얼해질 만큼 울어대는 매미와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티의 유리잔, 손안에 꽉 들어찬 청사과의 맛. 이 책을 떠올리면 아마 이런 것들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나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추억의 맛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달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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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4 0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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