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일들은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마치 필연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중첩된 우연이 특정한 정조나 감흥을 더 깊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다. 예컨대 일어난 순서는 이러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을 봤다.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에겐 하나뿐인 딸 테스와 사위인 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월터가 있다. 월터는 인공지능인 만큼- 테스와 존의 이야기로부터 마조리의 추억을 마치 월터 자신의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그라고 늘 완벽한 건 아니다. 때문에 그는 마조리가 그 대신 ~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다음번엔 마치 그녀와 그의 기억처럼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인공지능 월터는 전적으로 마조리를 수반하기 위해 존재할뿐더러 그에게 정보를 주는 존 역시 사위인지라 애초 존의 진술조차 완벽하진 않기 때문이다. 월터와 마조리에게 있었던 진짜 일들은 두 사람의 기억속에만 남아 있으므로. 연극을 원작으로 했다는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막과 장으로 구분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며 인공지능의 모습은 월터에서 마조리, 다시 테스의 모습을 갖는다. 진짜월터와 마조리, 테스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모습을 갖고 대화를 하고 기억을 완전하게 나누는 식이다. 노쇠한 존의 모습과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우리(관객)는 비단 치매를 앓는 마조리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억이 조금씩은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포즈의 그 날 본 영화가 <카사블랑>카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인줄은 알았으나 그게 극장도 아닌, 모텔에서 TV로 본 영화라는 것은 몰랐다. 마찬가지로 마조리가 확신하며 말하던, 사프란색 행진은 벤치에서 본 것이 아니라 TV 속 화면이었다. 때문에 기억이란, 결코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관건은 기억의 온전함이 아닌 그 기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이 달라져도, 기억의 디테일이 사라졌다 해서 그 감정마저 거짓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기억이란, 사랑이고 관계며 상처와 원망이란 그렇게 깊고 깊고 어려웠다.

 

영화를 본 다음날에 친구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그녀가 멀리서 오느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절반쯤 읽었을 때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오랜만이라 혹시라도 어색하지 않을까 내심은 염려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화는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 날 밤의 공기처럼, 앤틱한 가게에서 흐르던 재즈팝처럼. 하지만 안녕을 고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설명하기 힘든 공허감을 느꼈다. 버스 유리창에 기대서 우리가 나이를 들었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싶은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와 같이 냉소적이었으나 좀 더 어릴 때 가졌던 뜨겁고 열정적인 비관이 아닌 노인의 한숨 같은 체념을 품고 있었고 올 초에 힘든 일이 많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그녀는 이제 흘러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10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뜨거움과 질척거림이 신기하고 대견하고 불편했는데 이제 그녀는 내일 출근할 이야기와 돌아올 휴가에 대한 기대 외엔 지난한 관계에 대한 고민과 미련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도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날에 품었던, 그 광막한 외로움이 뭔지를 알 것 같았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때로는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원제 Levels of Life)는 지극한 러브 스토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여타 다른 책들이 그랬듯 이 책 역시 처음부터 그 맥락을 드러내진 않는다. 엄청나게 거시적인, 달리 말해 전혀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줄곧 꺼낸다. 두 번씩이나. 나다르와 베르나르의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지만 그게 이 책의 주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갸우뚱해질 무렵, 세 번째 변주가 등장한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땅에 있는 기구가 땅을 밀어내고 하늘 위로 오르듯이, 그도 아니면 반대로 하늘에 있던 열기구가 천천히 하강하듯이, 삶의 층위라는 제목처럼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위치가 필요했나보다. 쓰라는 독후감 대신 영화와 친구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글의 본심처럼 말이다(그렇다고 감히 나와 작가를 동일시함은 절대 아니다).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은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거소가,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구성처럼, 마치 연극처럼 장과 막이 나뉜 글 역시 뒤로 넘기다보면 본의를 알게 된다. 초반에 난해해보이는 난삽해보이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별한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상실에 대한 지긋한 상처의 기록이며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 두 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그녀는 늙는다는 개념을 증오했다. 이십대부터 자신이 마흔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이어나갈 삶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기를, 함께하는 옛 추억들이 늘어나기를 고대했다.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주제가 결혼으로 흘러갔을 때, 이마저도 우리가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했다. 더 이상 비장하거나 불안한 투가 아닌 덤덤하고 여상한 어투로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편적인 이야기, 대체로 유아적인 남편과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와 험난한 세상과 가족의 굴레와 무게에 대해서도 말을 나눴지만 결정적으로누군가와 함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공간을 나눠 쓰고, 생활방식을 타협하고, 배려하고 배워가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들. 가족과도 오랜 시간을 들여 타협했고, 여전히 맞지 않은 부분이 산재해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과 함께 집을, 방과 침대를 나눠 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에 대한 탄식을 나란히 뱉었고 때문에 결혼이란 무모한게 아니라 용감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줄리언 반스는 (우리가 생각한) 용감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즐거워했던 것은 스스로가 앞서 말한, 생활공간을 나눠 쓰는 등의- 결혼생활 자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아내와 하는 결혼생활을 아꼈고 거기서 활력과 안정을 얻었다. 때문에 상실 이후는 더더욱 힘겹다. 그를 위로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해보라며 권하기도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나 여태까지의 일상을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일들을 아내와 함께 하는 것, 혹은 혼자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아내에게 설명하고 조언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없이 하는 일을 즐겁지 않거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사별의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진부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한 비교 하나를 들어보자. 차를 다른 브랜드로 바꾸고 나면 갑자기 길 위에서 같은 브랜드의 차들이 수도 없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그 차들이 의식에 각인된다. 아내를 잃게 되면, 갑자기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전까지 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다른 운전자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별의 아픔, 상실을 이렇게 이성적으로, 자신의 슬픔의 단계와 감정을 분석해서 쓴 글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놀랍게도 세상에는 자신의 슬픔도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에겐 단계와 층위와 해부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작가가 그렇다고 단정지으려는게 아니라 내가 그랬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해서 더 괜찮은 건 아니다. 작가는 중간중간 자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단 이야기를 한다. 어조가 담담해서 마치 농담처럼 들리지만 분명 진심일 거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떠나간 아내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며 자신마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내의 기억도 소실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죽음 자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보다 유실된 기억과 사라지는 존재감이 두려워서 죽음을 거두는 마음이라니, 상상하기가 어렵다전날 본 영화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과 그날의 분위기,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억은 아름답고 숭고하고 대단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잔인한 거짓의 파편이기도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드러났던 선의의 거짓말과 어긋난 기억을 듣다 보면, 아내를 담고 있는 자신마저 떠나는 것이 두렵다는 작가의 말이 과장만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한다.

 

진단이 내려진 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는 37일이 걸렸다. 나는 그 사실을 추호도 회피하는 법 없이 늘 직시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미친 사람의 지혜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거의 매일 밤 병원을 나서면, 그냥 하루 일과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내가 분한 마음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어쩌면 저렇게 게으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기들의 무심한 옆얼굴을 여보란 듯 보여주고 있단 말인가. 세상이 이제 이렇게 변하려는 참인데.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사별의 고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와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모습조차 사람들은 요즘 좋아 보인다며 인사를 건넸고 옛말에 남의 말도 석 달이란 말이 맞긴 한지, 있었던 일을 잊고 같이 여행을 가자며 조르는 사람이 신기했다. 머릿속 한 편으론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인지, 영화에선 툭하면 행성이 부딪히고 외계인이 불시착하던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돌아오는 길에 그리도 우울했었나보다. 있는 힘껏 아끼거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도 열정을 다해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 상태가 평화로운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세상을 살리는 일, 달이 차고 저무는 일에는 관심도 없는 분노에 찬 상실감을 겪는 작가보다 내 자신이 더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화를 내거나 슬픔을 느낀다는 일들도 기실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집에 거의 다 와서 택시기사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즐겁고 뻔했다. 그러다 마침내 치고 들어오는 경쾌한 질문.

아내 분은 주무시고 있겠네요?”

말없이 감정을 억누른 끝에 나는 가까스로 찾아낸 유일한 말로 답했다.

그러면 좋겠네요.”

 

이제껏 하나였던 적이 없었던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그리고 하나였던 것을 둘로 쪼개는 것.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둘의 공통점은 용감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했던 것처럼, 열기구를 타고 정확하지 않은 하늘의 틈을 헤치며 날아오르듯, 두 사람이 결합하는 과정과 서로를 잃는 것, 그 후에도 계속 묵묵히 살아가는 것 역시 내게는 똑같이 지극히 용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용감한 사람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랑을 안고 살아가는 모두의 밤과 낮이 오늘도 평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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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3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