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2월 31일이다그러나 새삼스레 한 해를 돌아보며 열정적인 후회를 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민망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나이를 곱씹으며 과장한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 한다아마도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그러니 마찬가지로 한 해를 보내며 읽어야 할 마지막 책이라며 호들갑 또한 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며칠 전 터미널 앞 카페통유리로 된 창가에 앉아서 이 책을 읽었다부러 장소를 선정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아니나 읽다보니 이보다 더 적합한 순간이 있을까 낯선 감탄이 일었다. 12스산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출입문으로 새어들어오고 먼지처럼 내리는 눈발을 간간이 내다보며 읽은 책은 소설가 손흥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첫 챕터를 읽은 후 책의 앞날개로 돌아가 작가의 나이를 돌아본다. 1975년 생한참 젊은 나이다이문구와 오정희. 처음 떠올린 것은 둘이었고 그 다음엔 지금은 신축으로 공사한 옛날 큰아버지 댁이었다소와 여물이 있고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던, 그래서 언니가 가기 싫어했던 집이었다기껏해야 우리가 그 집에 가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많으면 세 번이었음에도 그 냄새와 마당의 진흙과 예쁜 눈을 가졌던 소의 눈은 여전히 기억이 된다외갓집은 그보다 나았다꽃이 있고 털이 하얀 강아지가 있었고 할아버지의 자전거와 호미 같은 것들이 널려 있는 곳엔 어린 사촌동생이 타던 낮은 장난감 자전거도 있었다. 어떤 것들은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그리고 문득 어떤 냄새공기날씨를 보며 그 날을 떠올리게 된다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아스라한 향수정확히는 거기 있었던 지도 몰랐던 어린 날의 어떤 지점을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다


우르슬라에 비유한 고모의 죽음이나 그녀들의 아들들과 딸할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 함께 소의 궁둥이를 밀어 트럭으로 싣고 장에 나갔다가 소머리국밥을 먹고 온 일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이견과 그 사이에서 시소를 타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태도와 외동의 난감함 같은 것건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산수유와 감옥에 갔던 일과 하다못해 이스탄불에 체류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작가에겐 오래된, 빛 바랜 냄새가 났다. 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도시에 대해 쓰는 작가들은 차고 넘치고 특히 젊은 작가들은 대부분 도시의 삶과 그 진절머리에 천착한 이야기를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마흔 다섯(내일이 새해라는 것을 감안, 한 살을 높임을 사과한다)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어린시절과 자신의 삶에는 갖은 냄새와 촉감과 추억인지 향수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했다. 그게 낯설었고 동시에 신선했으며 조금 부끄럽게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아마도 넛할아버지는 아직도 캄캄했을 새벽에 집을 나섰을테고 초겨울 짧은 해가 지고도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야 그 집으로 돌아갔을 테다오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오직 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손등 한 번 쓸어보기 위해 다니는 이 없어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곶감을 지게에 지고 걸어왔을 넛할아버지.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러나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니, 사실 겨울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평생을 기척도 없이 살다 가신 분인지라 강렬한 기억이 생전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이 문득문득 미안하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숨을 쉬는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분의 삶의 태도같았던 날숨과 뻣뻣하게 자란 하얀 머리와 막내딸과 손녀를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이 잠시 흐른 뒤 춥지 않느냐, 밥은 먹었느냐 묻던. 그리고 이제는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가족들 중 누구도 보지 못한 저 먼 곳에 걸린 현수막도 읽을 수 있는 시력으로 굳어가는 다리 때문에 집 밖으로는 혼자 나가지 못하는 분. 옆에 놓인 고무나무 화분처럼 해가 있는 곳에서 늘 바깥만 바라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비죽 눈물이 나온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신기한 일 중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해선 한없이 메말라있는데 어떤 부분에선 믿을 수 없게 눈물이 쉽게 나온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다. 그 책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필멸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못내 서럽다.

 

문학은 언제나 가망이 없었을 따름이며 문학을 죽음 직전에서 일으켜세우는 건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나의 환멸은 뿌리가 깊다. 어쩌면 그해를 지나쳐 더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학이 무언지 모르던 시절까지 혹은 문학이 생겨나기 전에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이 없는 그곳에 이르면 아마도 누군가는 기어이 그곳에서 문학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묵새기고 앉아 문학을 이야기할 것이며 설령 벽도 천장도 없는 벌판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혹은 오르지 별과 달만이 머리 위에 빛나고 있을지라도 그 별과 달을 쓰기 위해 기꺼이 고독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알게 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

 

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남김없이 쓴다 해도 결코 완전하게 쓸 수 없으리라는, 아무리 적게 쓴다 해도 너무 많이 쓰게 되리라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이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글을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으리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편의 글이 완전하다면 그 이유는 글 자체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해서가 아니라 글의 틈이나 군더더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소거하며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고작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그것으로 충분하겠냐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그 수동적인 행위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힐난도 해보고 적당히 구슬려도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도무지 나는 대답이 없었다. 자주 그러했다. 더 완벽한 때를 기다린다는 신중함을 방패 삼아 게으름을 정당화했고 어차피 안 되었을거란 불분명한 절망을 근거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허나 열심히, 꾸준히 쓰는 사람들 앞에서 늘 똑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죽는 것이 서러울 것 같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터키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오르한 파묵이 아니라 아지즈 네신이라고 말하는 작가를 앞에 두고 어찌할 바 없이 12월에 멈춰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무척 불편했던 영화를 만든 작품의 신작 포스터를 보고서 나쁜 작품을 쓰는 것보다는 나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계절이 있었다. 그 때부터 작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것도 아니고 등단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그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견디는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그런 해였다. 여전히 문장은 헤지고 형편없지만, 쓰고자 하는 욕심의 절반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룩거리면서도 무언가를 썼다는, 도마뱀의 꼬리보다도 짧은 안도감. 작가가 쓰는 소설가의 일, 문학의 자격, 쓴다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좋은 문장을 쓰는, 이처럼 편안하게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것 같은 글을 쓰는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내 고민 따위는 너무도 당연하다.


기꺼이 나이를 떠올리지 않고 지난 해를 후회하고 앞날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실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것을 가까스로 인정하면서 어쩌면 작위적인 태도보다도 지금 이 인정이 나이를 먹는다는 진짜 물증일수도 있겠다. 그래 12월은 어쩔 수 없이 향수와 서글픔과 울음의 계절인가보다. 그리고 겨울을 관통하는 이 시기에, 따뜻한 차 한잔과 조금의 눈물과 함께 이 책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12월 31일이다. 또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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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Shining 2019-01-03 09:41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 늦었죠ㅠㅠ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많이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요 :D

2019-02-02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