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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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백 번 정도 한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의 개인사를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애정에 눈이 가려지기 마련이고 헌데 인간이란 본디 얼마정도는 서로를 실망시키니. 혼자만의 믿음이 깨지거나 바닥없이 아스라한 배신감에 시달리다보면 가능한 한 사적인 부분을 눈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잘 되진 않지만 꾸준히 시도한다. 배우는 캐릭터로, 작가는 오로지 완성한 글로 판단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이 책은 그런 원칙의 면에서 적합하다. 번역가가 이야기해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는 어느 정도의 개인사가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써내려간 의도나 의중에 대해서일뿐 그들의 성격이나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번역가가 자신이 만난 작가들에 대해서 써낸 에세이로 분류되긴 하나 예상 이상으로 평론적이며 다소 학술적인 접근법을 갖춘 책이다. 일부 발췌한 문단을 빌려오면 이러하다.

 

그는 1959년 첫 장편 구빈원 축제로 미국 예술원 로즌솔상을 수상했고, 이십대 후반인 1960년에 달려라, 토끼를 출간하여 그 세대의 대표 작가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인 1963년에는 켄타우로스로 전미도서상을 받고, 1964년에는 최연소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업다이크는 화려하게 조명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업다이크가 젊은 시절에 반짝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평생 우려먹는 작가였다는 뜻은 아니다(업다이크 자신은 불가리아 여자 시인에서 베크의 입을 빌려 그런 자화상을 슬쩍 그려내기도 하지만). 상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십대에 들어선 1981년에는 토끼는 부자다로 퓰리처상, 육십대에 들어선 1991년에는 토끼 잠들다로 다시 퓰리처상을 받았다(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 이상 수상한 작가는 업다이크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세 명 뿐이다). 토끼는 부자다를 발표한 직후인 1982년에 타임은 업다이크를 두 번째로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는데, 이때 표제가 오십 세에 위대해지다였다.

 

(중략) 업다이크는 상복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68년에 발표한 커플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일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또 젊은 시절 잠깐 시민권 운동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국가기구와도 대체로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국무부에서 파견한 미소 문화교류 문화사절로 동구를 순회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각각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화적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나보코프가 영화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앞이 보이지 않는 알비누스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영화로 본다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을 쓰던 시점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영화와 소리의 결합(1929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상투적 수법이 된 지 오래지만, 오나전한 암흑 속에서 소리만 들려줄 때 오히려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알바누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눈앞에 드러나는 현장을 나보코프가 무대 지시 사항이라는 말을 앞세워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러 해석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영화를 의식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은 플롯의 전개 속도, 또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딱 영화로 만들기 좋게 짜인 플롯과 대사이고, 그런 면에서는 오늘날의 대중소설과 흡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일 만한 대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영화적이라는 평이다.

 

앞서 밴빌이 조이스에게 받은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밴빌은 가디언과 이야기하면서 모든 아일랜드 작가는 조이스 추종자와 베케트 추종자로 나뉘는데, 자신은 베케트 진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특히 아일랜드 내에서 밴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가 능력으로 보나 성취로 보나 베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존 업다이크의 수상경력과 이력, 상업적 성취에 대한 정보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향한 대략적인 중평, 밴빌 자신의 발언과 밴빌을 향한 발언을 인용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태도나 의견은 숨기는 편이다(물론 이런 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자체가 저자가 그러한 논조에 동조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나). 가능한 한 독자에게 사실만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인상적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을 꺼내든 독자들의 호와 불호는 나뉠 수도 있겠다. 재밌는 건 출판사 역시 이 점을 의식한 것 같다는 짐작이다. 번역서 외에는 책을 내지 않은 저자가 이 책과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두 권을 동시에 발표했다. 물론 같은 출판사다. 공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벼운 에세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저자의 번역 원칙 등이 궁금하다면 다른 한 권을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거나 재미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의 이야기도 겻들어 등장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번역과 관련된 그의 생각 일부를 읽을 수 있는데다 작가들의 이야기 중에도 문득 자신의 의견이 새어나올 때도 있다. 이런 식이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 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척하는 삶에서 끝애와 하타가 기대하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사십대로 들어선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로 한 바퀴 원을 그리듯이 다시 히스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내부보다는 외부를 관찰한다. 공항에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관찰하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지만, 왠지 노스탤지어도 묻어나는 듯하다.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중략) 사실 나 자신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들이 너무 자신의 내부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이런 느낌은 알랭 드 보통과 나의 나이 차이, 즉 서로 속해 있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p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와서 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려,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이나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는 외부에 대한 관찰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지점에 이른 듯하다.

 

매카시가 긴 은둔 기간을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보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하니 궁핍도 대단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거의 팔 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했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대학에 와서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자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물론 그뒤로 일주일 동안은 또 콩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라는 것이 매카시의 말이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나곤 했다(한번은 코카콜라가 지원금을 주었다고 하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명사가 사라진 로드의 흑백의 세계에 빨간 코카콜라 캔이 도드라지게 등장하는 것이 그런 인연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한마디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일화 중심이고 의견을 표명할 때 마저 꽤 조심스러운 태도다(알랭 드 보통에 대한 이야기가 그나마 저자의 생각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 같다). 일각에선 남의 이야기를 빌어온 것처럼 신중하다못해 모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는 저자로서, 특히 자신이 만난 작가들을 향한 존중과 애정이 깃든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나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별개로 만나고 싶은 독자에겐 일종의 길티플레져 역할을 할 수 있다.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고 재밌지만 즐겁지는 않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 작품과 작가 개인을 연결하고 있으니. 

 

저자가 워낙 유명한 번역가인데다 걸출한 작가들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책에 인용된 작가의 목록만 봐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독자도 많을 거다. 책을 좋아한다면 아마 이 중 적어도 한 명쯤은 좋아할 게 분명하고 작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본 책이 한 권 이상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저 '책'을 좋아한다면 이 책이 흥미롭지 않기 어렵다. 이 책을 읽고나면 필연적으로 이 안에 들어있는 작가들, 그들의 책을 더 만나고 싶어진다. 그러니 짓궂게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자기홍보 수단이 어딨으랴(작가와 독자 사이의 연결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선 번역의 본질과도 비슷한 책이니 흥미롭다). 무엇보다 저자가 -번역책으로 만났을 때도 느꼈듯이- 글을 잘 쓰는 문장가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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