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선의 사람들 -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의 9년간의 재난 복구 기록
가타야마 나쓰코 지음, 이언숙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난에 맞선 작업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휴먼 드라마"

 

가타야마 나쓰코의 <최전선의 사람들>을 읽고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집념 어린 취재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진실을 발견하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기억하시나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후쿠시마 제 1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1~4호기에서 발생한 원전사고이다. 방사능 유출의 위험 속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원자력 안전, 보안 원, 원전 작업자들, 도쿄전력 직원들이다.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원전사고 재발 방지와 수습을 위해 9년간 노력해왔다. 

 

이 책 『최전선의 사람들』은 <도쿄신문>사회부 기자인 저자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2019년까지 9년간 원전 현장에 잠입해서 진실을 밝힌 기록이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9년간 100여 명을 취재했고 취재 노트만 약 220권에 달했다. 관련 기획 기사만 140여 회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재난인데도 불구하고 9년 간 일본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저자는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원전사고 수습 및 재발방지 노력을 하는 것 대신에 사고를 축소하고 은폐하는데 급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본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정부가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책임전가 및 책임 회피의 모습을 보인 것은 실로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100여 명의 원전 작업자들의 목숨을 건 필사적인 사고 수습 노력이 없었다면 일본은 제 2의 히로시마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유출의 위험은 남아 있다. 방사능 유출로 인한 인근 바닥가 오염이 되고, 오렴수를 해양에 그대로 방출하는 것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개최지가 후쿠시마였고, 선수촌 식재료를 후쿠시마산 재료만 사용하도록 했다. 아직도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유출이 의심되는데도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그 당시에도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일본 정부가 이기적이고 안일하고 원전 사고를 처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대형 재난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정부 차원의 대규모 지원이나 방지 노력이 필요한데 겨우 100여 명의 작업자들 개개인의 노력에만 의존하다니 선진국이라는 일본의 형태가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이 일이 '쉬쉬' 하면서 숨기고 비밀에 부치면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원전 사고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일본 국민들인데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저자는 이런 무책임한 일본 정부의 태도와 비교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어떻게든 사고를 수습하려고 분투한 작업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그들의 노고를 알게 한다. 일지 형식으로 된 기록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은폐되어 왔던 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재난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였지만, 그들의 노고와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나 평가 없이 마치 일회용처럼 쓰이고 버려졌다. 그동안 '뉴스'로만 접했고 잊혀졌던  원전 사고 작업자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생생히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명확히 깨닫고 기억하게 한다. 

 

모두가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기 급급할 때 왜 그들은 치사량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된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은 것일까. 피폭 되면 분명 암이나 백혈병 같은 병에 걸려 고생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인 것이다.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일상생활과 그들이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가 과연 무엇 때문에 가능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마음 껏 사용하는 전기가 그들의 희생과 맞바꾼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들의 노고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하고 피폭으로 인한 그들의 질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줘야 하겠다. 비록 늦었을 지 모르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들에게 원전사고에 대해 해명을 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원전 사고 작업자들 노고를 치하하고 물질적 정신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 우리보다 먼저 암에 걸린 겁니까?” 지금도 현장에서 피폭과 싸우는 작업자들이 진심으로 걱정을 해줬다. 히로 씨는 이런 말을 했다. “가타야마 씨, 닫히는 문이 있으면 열리는 문도 있습니다.” 히로씨도 병으로 고통받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을 여러 번 되뇌며 가슴에 담았다.

---「나가며」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놓았던 손 다시 잡으며
송용식 지음 / 마음시회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들"

 

송용식의 <놓았던 손 다시 잡으며>를 읽고




“마음 가는 대로 세상을 살아오진 못했지만

글만은 마음껏,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었다.

 

사람이 힘들고 지칠 때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은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세상은 마음 가는 대로 살아오진 못했지만, 글만은 마음껏 ,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한 사람의 글을 만났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보거나 사소히 보지 않는 그 사람의 따뜻함과 사랑이 전해진다.

 

이 책  『놓았던 손 다시 잡으며』는 공학박사였던 저자가 늦게나마 문학의 길,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나서 쓴 글이다. 공학박사가 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못내 꿈꿔왔던 작가의 길을 늦게나마 시작하면서 그가 세상에 선보이는 글이다. 그래서 그런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저자의 예민한 통찰력, 따뜻한 감성, 섬세한 표현 등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세상 모든 관계와 삶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때로는 애잔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풀어낸 마음들이 모여서 일상 생활에 지친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우리의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저자는 마치 자신의 생각을 마음가는 대로 쓴 수필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와 생각들을 자유롭게 풀어낸다. 이 책 속에서는 저자인 '송용식' 의 꿈과 인생이 녹아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어보면 진솔하고 솔직함에 더욱더 공감하고 그의 글을 통해 무한한 위로와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는 말한다. 글쓰기는 곧 생이 닫힐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놀이라고 말이다.

 

어차피 대가의 싹수는 보이지 않으니 글감에 따라 마음 가는대로 쓴다. 

생이 닫힐 때까지 할 수 있는 내 놀이이다.

-p. 2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넬라의 비밀 약방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의 약을 오직 여자들에게만 파는 비밀 약방의 비밀과 그 약방을 둘러싼 연쇄 독살사건이 너무나 궁금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파수꾼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이란 무엇일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음의 파수꾼>을 읽고



2022년 리커버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음의 파수꾼'

 

“난 당신만을 사랑할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관심 없어요.”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랑, 이것도 사랑인 것일까요. 사랑의 의미에 대해 묻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에는 배타적인 측면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 이외에는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 정말 사랑은 이렇게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살인도 가능한 것일까. 내 사랑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이 책  『마음의 파수꾼』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사랑의 양면성, 이중성에 대해 묻고 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발견하게 된 인간의 이면, 사랑의 극단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할라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45살의 도로시는 어느 날, LSD에 취해서 차에 뛰어들은 20대 청년 루이스를 만난다. 갑자기 뛰어난 그 청년으로 인해 도로시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던 폴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청년조차 죽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된다. 가족도 없어 그를 보살필 사람이 없었던 상황에서 도로시는 그 청년을 측은히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그 때부터 루이스와 도로시의 위험한 동거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다친 루이스를 병간호하면서 돌보려는 의무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자라나게 된다. 특히 루이스는 자신에게 진심을 다해 보살펴주는 도로시의 마음에 반해 점점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도로시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기 시작한다.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루이스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명백한 살인이지만, 도로시 또한 루이스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느새 그 살인의 이유를 루이스에게 제공하고 동조한 공범이 된다.  살인도 불사한 루이스의 도로시를 향한 맹목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루이스의  사랑은  과연 살인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가진 사랑의 개념에는 배타성이 개입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하지만 여섯 달이나 알고 지냈는데 폴에 대해 아무런...호감도 아무런 애정도 없다는 거야?"

"난 당신만을 사랑할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관심 없어요."

-p. 145- 

 

결국 루이스는 영화배우로서의 성공과 막대한 부를 버리고 루이스 곁에 남게 된다. 그녀의 마음의 파수꾼이 되어서 루이스와 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제 루이스, 도로시, 폴과의 세 사람의 불편한 동거와 생활이 시작된다. 이제는 도로시도 루이스가 그녀 곁에 있어야 함을 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루이스가 곁에 있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를 오래 데리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영원히. 당신도 잘 알고 있는 바잖아."

(중략) 

"당신 이렇게 지내는 게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죠, 무척."

내가 대답했다.

-p. 184-185

 

아마도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비록 루이스의 사랑이 너무 극단적이고 맹목적이라 할 지라도 도로시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마음의 파수꾼』에서 루이스와 도로시의 사랑을 통해 사랑의 이중성, 양면성을 가진 사랑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여전히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 같다. 

 

#이 글은 소담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강의 특별한 시도 '에세이 소설"

 

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음의 푸른 상흔>를 읽고



2022년 리커버 개정판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음의 푸른 상흔'

 

-소설과 에세이의 벽을 허물어버린 프랑수아즈 사강의 에세이 소설-

 

우리는 소설이란  작가의 상상과 의도에 따라 지어낸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에세이는 작가가 인생,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을 말한다. 그런데 소설과 에세이의 벽을 허물고 이 두 개의 장르를 하나로 합친다면 어떨까. 소위 말해서 '에세이 소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하고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는 사강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형식을 파괴해서 에세이와 소설의 벽을 허문 독창적인 시도를 한 작품인 『마음의 푸른 상흔』을 만났다. 이 책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에세이 소설이다. 사강은 19살에 첫 번째 소설인 『슬픔이여 안녕』으로 문학비평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를 한다. 그 후 18년이 지난 후 37살에 '에세이소설'이라는 다소 독창적고 낯선 형식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1년 여의 집필 후 이 책 『마음의 푸른 상흔』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에세이 소설을 처음 접한 나에게 이 책은 너무나 독특해서 처음에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소설 속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엔 저자인 프랑수아즈 사강 자신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다시 소설 속 등장 인물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강의 의도대로 소설과 에세이라는 형식을 파괴하고, 등장인물과 작가 라는 거리도 없애버려 등장인물과 사강이 함께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강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스웨덴 출신인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를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들 남매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왔지만, 무일푼이며 직업도 없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 남매들이 어떻게 파리에서 생존해 나가는지에 대한 그들의 '파리 생존기'이다. 사강은 그들 남매의 생존기를 써내려가면서 그녀 자신의 이야기 또한 들려준다. 그녀가 첫 소설인  『슬픔이여 안녕』 이후 직업 작가로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그녀의 진심, 그녀의 인생, 일상 생활에 대한 생각, 페미니즘을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그녀의 의견 등 어떤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녀의 생각을 써내려간다. 

 

이렇게 한참 그녀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소설 속 주인공 이야기로 돌아간다. 사강은 이 등장인물에게 많은 애정을 느끼고 그 등장인물 속에 그녀 자신을 투영해나간다. 즉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는 '액자식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는 작가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만나서 함께 한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마치 작가가 등장인물이 존재하는 소설 속 공간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다. 보통은 작가는 소설 밖에 존재하는데, 사강은 소설 속에 들어가 그들과 소통한다. 사강은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그들 남매가 곧 사강 자신이지 않았을까. 그들 남매의 파리 생존기를 통해 사강 자신도 그렇게 자신이 살아왔음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런데 소설 속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가 파리에서 생존하는 방식은 과연 옳은 것일가. 소설 속에서 이 남매들의 끈끈한 정과 믿음, 신뢰가 돋보인다. 그들이 무일푼이기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들의 외모와 매력을 이용해서 그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고도 파리에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들 남매는 너무나 외모가 뛰어나서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선의를 살 수 있다. 항상 그들에겐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들과 가까워지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 남매는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그들 남매만 믿을 뿐,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 사람들이 보이는 호의와 사랑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적당히 그 마음과 사랑을 받아주면서 그들 남매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들의 생존 방식이 통할까.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외모를 포함한 육체적인 매력을 이용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강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19살 첫 소설인 『슬픔이여 안녕』으로 화려한 데뷔를 한 후,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인기와 명성에 힘입어 살아왔다. 처음에는 그 명성이 뿌듯함을 주었지만, 점점 더 부담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그 작품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작용해서 어느 날은 글을 한 글자로 쓰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직업 작가로서 느끼는 고뇌, 스트레스, 불안이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 이야기 이면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려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하며 앞으로도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왜 글을 쓰냐는 질문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울증을 피할 수 있다고, 적어도 그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모든 텍스트의 절대적인, 고유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심지어 논문이든, 이처럼 늘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p.135

 

그래서 소설 속 이야기보다는 사강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가 더 인상적이다. 어쩌면 사강은 그들 남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에세이 소설' 이라는 독특한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강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로서 이 책을 통해 프랑수아즈 사강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사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의 푸른 상흔'의미를 살펴보자. 사강은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의 생존방식과 로베르 베시의 고독한 죽음에 대해, 그녀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 그렇게 영혼에 푸른 멍이 든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약하고 소중한 우리의 영혼을 잘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한다. 그렇게 영혼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푸른 멍까지 들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흔의 심각성을 보고 난 후에야 그 심각성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상흔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고 자초한 것이라고 사강은 우리에게 말하며 경고를 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빼앗아가는 것은 뭔가 약하고 소중한 것, 기독교인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영혼을 잘 돌보지 않으면 어느 날 숨이 턱에 차 은총을 구하는 영혼의 상흔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흔은, 분명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 p.139

 

사강이 말했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것은 나는 나를 치유할 권리도 있음을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 우리가 자초하고 잘 돌보지 못했던 영혼의 상흔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돌아와야 함을 소설 속 등장인물과 사강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사강은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문학, 사회 현상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상처 입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치유를 통해 영혼의 상흔이 아물기를 바란 것이다. 

 

사강을 좀더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사강의 특별한 시도인 '에세이 소설'  『마음의 푸른 상흔』을 추천하는 바이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당신의 귀감이었습니까, 아니면 악몽이었습니까? 인생이 당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당신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당신의 눈 색깔이, 당신의 머리 색깔이 어떻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습니까? 밤이 두렵습니까? 잠꼬대를 합니까? 당신이 남자라면, 성질 고약한 여자들을, 여자란 자고로 따뜻한 날갯죽지에 남자를 품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들을―최악은 그럴 줄 안다고 착각하는 여자들이죠―떨어져 나가게 할 가슴 시린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상관부터 아파트 관리인까지, 마주치기도 싫은 주차단속 요원부터 한민족 전체를 책임지는 불쌍한 마오쩌둥까지, 모든 사람들이―당신을 포함해서요―외로움을 느낀다는 걸, 죽음만큼 삶에 대해서도 두려워한다는 걸 아십니까? 이런 진부한 생각이 두려운 것은 이른바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그것을 늘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기거나 적어도 살아남기만 바라니까요. 

-p.70



#이 글은 소담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