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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용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한 사람을 위한 문학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라디오를 통해 자주 목소리를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더 뵙고 싶은 작가다. 그 이유는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야기 바깥의 공간들 선릉 주변을 산책하고, 「미스터 심플」의 인물을 떠올리며 무인 세탁소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난 뒤에도 인물과 장소가 현실로 이어지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가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감정이 고양된다기보다는,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정돈되는 느낌에 가깝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의 소설은 분명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강하게 다가온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보이게 만드는 문장들이다.
작가는 자폐를 가진 인물과 함께 선릉 주위를 맴돌고, 모두 타버린 종묘를 바라보며, 당근을 매개로 서로의 아픔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이야기를 쓴다. 이 소설들은 거창한 사건 대신, 잃어버린 것들의 흔적을 더듬는 행위에 집중한다. 무엇인가를 따라 걷고, 머뭇거리고,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인물은 자신을 조금씩 마주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혼란 속에 있고, 쉽게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망설임 자체가 하나의 진실처럼 느껴진다. 사라져가거나 이미 소멸된 것들을 붙잡으려는 시도, 혹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의 소설을 오래 남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이야기를 읽었다기보다 누군가의 걸음을 잠시 따라 걸었다는 감각이 남는다. 정용준의 소설은 그렇게 독자를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힘이 깃들었다. 나도 모르게 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걸음을 따라 걸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본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두부」 속 두부를 만날 수도 「미스터 심플」 속 미스터 심플을 만날 수도 있다. 「이코」 속 주우를 마주할 수도 있다.
나는 그 어떤 만남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그들과 함께 발을 맞추어 걸을 것이다.
이 작품을 한 사람을 위해 마주 걷고 싶은 사람 혹은 나를 위해 걷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