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9억년 전 지구의 하루는 18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달도 지금의 달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훨씬 가까이 있어 지금보다 몇 배의 큰 달로 보여 지금처럼 아름답고 은은한 동경의 대상인 달이 아니라 두려움의 달이었다고 한다. 그 때의 원시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현대인들처럼 하루 24시간의 시간도 모자라 조급하거나 허덕거려야 하는 삶이 아닌 돌도끼 들고 나가 사냥 나갔다 돌아 오면 하루치 삶은 충분했던 시절. 먹을 것 입을 것 저장해 놓고 살지도 못했지만 근심도 걱정도 저장해 놓을 일이 없었을 시대…
그런 시절의 단순함을 우리 유전자 속에서 꺼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종교생활은 마음의 평화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으며 성경구절을 읽고 공부하며 하나님이 말씀 속에 있는 삶의 지헤와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특정 종교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고 있다.
어떤 종교를 보아도 결국은 사랑, 평화, 존중…의 메시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를 바 없다.
불쾌하고 치졸한 붉은 피로 가득한 철철 넘치는 피의 싸움이었다.
이 책은 한 쪽의 편협한 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주 불편한 책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바라본다면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신심이 깊은 친구에게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책에 대해 말을 꺼냈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슬람교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은 그리스도교의 초심자인 나에게 설득하려고만 했을 뿐…
그래서 더 이상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에필로그에 나온 말처럼 종교가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남긴채…

이슬람 그리스도 두 종교는 모두 알라-하나님으로 대표되는 같은 신을 믿고 있다.
이슬람교의 근본 정신은 ‘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 사도이다. ’란 귀절 속에 나타나 있다. 곧 무함마드는 사람이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신 알라의 가르침을 완전히 전한 위대한 최종 예언자로 본다.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신(信)과 행(行)의 두 가지가 있다. 信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유일신 알라, 성전, 천사들, 예언자들과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는 것 등이고 行은 신도가 해야 할 의무이며, 이슬람의 오주이다. 고백, 예배, 희사, 재계, 순례 등이다. 그 밖에 성전(지하드)이라고 하여 이교도나 불신도와 싸울 의무를 제6주로 삼는다.
또한 성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음식에 대한 규정, 도박 및 고리 대금 금지를 비롯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일체의 행사에 대해 교도가 지켜야 할 규율이 규정되어 있다.
이슬람 교도에게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른 독특한 생활과 풍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교단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다처제가 그 한 예인데 이것은 무함마드에 의해 일어난 포교 운동 중 희생자가 된 남자들의 처자를 부양하기 위하여 다른 남자가 4명까지 과부를 거느릴 수 있게 허용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대외 발전과 인구 증가책으로 이 제도가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외출할 때 몸을 거의 감싸서 다른 사람에게 얼굴이나 몸을 보이지 말아야 하며 가정 안에서도 여성의 거주 구역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풍습이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한편, 토착문화와 전통에 대한 폭넓은 수용과 절충으로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사방으로 전파하였다. 이슬람이란 단어는 평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교리는 단순하고 명료하여 이슬람은 비잔티움과 더불어 고대의 학문을 계승하고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여부 등과 같이 교리상의 차이와 해석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벌어져 갈등과 반목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대결과 갈등 그리고 비극을 되풀이해 왔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종교와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적인 정치적 권력과 어울어져 종교와 권력을 동일시하는 세력에 이용되어 더 큰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해 왔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이전만 해도 무슬림과 그리스도교도들은 교류가 있었고 관용적이었었으나 636년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7세기 중엽부터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공격하여 계속 영토확장을 하였다. 그런 중에 팔레스타인에게 아랍계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고, 중동전쟁 후 유대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쫓겨나야 하는 억울한 신세가 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아랍과 이스라엘은 미국 그리스도교계의 반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듯 얽히고 섥힌 대결구도 속에서 계속되는 싸움만 되고 희생과 파괴만 반복된 전쟁.
과거엔 분쟁과 파괴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맞이할 시대는 공존과 상생의 시대이다.

저자는 말한다. “꾸란에서 말하는 ‘진리에의 복종’과 ‘기도와 자선’을 더 깊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실천하고 예수의 사랑과 휴머니티를 다시 발견하고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충실히 건설해 나간다면 공존과 사랑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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