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김마림 옮김 / 미메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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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을 위해 뉴욕으로 올라와 정착한 리버럴 성향의 젊은 무명 작가가 주인공. 

거액이 오고 가는 선택받은 상위 0.1 프로의 예술계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만 존재하는 허상의 그물망으로부터 벗어 나오지 못하고 
입증하고 싶다는 강박, 지금 거기의 니 스텝이
'약간의 계산된 차이' 정도는 드러냄으로써 살짝 비껴서 있는 척한다.

알리비이 치고는 비루한 알리바이.

성소수자 다양성 인권 배려 존중 공감과 함께 '쿨한 거리두기' 
차별 반대까지 표시해 넣어 줘야지?? 
소문의 구름에서 내려온 '적재적소의 깨어있음' woke을 잃어버리지 못하고 

선넘지 않은 세련됨에 집착하는 여시 깍쟁이 유대인 힙스터의 삶.. 

그 모든 재수없음이 이 만화 속에 깃들어 있다.

마지막 순간의 좌절까지 살랑거리듯 생동감이 넘치고, 
그래픽적으로도 다채로우면서 선이 굵고 
시각적 주제에 대한 주목성이 확실하다. 

솜씨 좋은 장인의 수법이긴 하지만.

후일담(post-)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제는 더 고민될 문제가 아니라서 
뱃속에 짙은 엑기스로 남아있지 않은 예술가의 좌절과 센티멘탈이 
대가리가 꽃밭인 슈퍼 히어로-페어리 테일의 옷을 입고 
적당히 봉합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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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이호준 옮김 / 청하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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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1쇄가 나왔고 내가 읽은 책은 2002년판이다역자는 출가했다가(지산 스님) 2010년에 작고 하였고, 전해 듣기론 한 때 이 책이 한국에서 라마나 마하리쉬 붐을 일으켰다고 한다마하리쉬와 관련 책을 여러 권 사놓았는데 올해 구정 쯤에 이 책으로 이 이를 처음 접했다.

*


 남인도의 쉬바 신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산 이 사람은 따로 스승이 없고 수행집단의 체계적인 지도 하에서 깨달은 이가 아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문득, 그것도 미성년자 때 견성한 이라고 한다어렸을 때 이름은 벵카타라만마하리쉬라는 이름은 그의 제자가 붙여준 이름이다.

어렸을 때 죽은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집안도 비교적 유복했던 듯하다죽음에 대한 공포에 심하게 시달려서 죽은 시체가 되는 상상을 많이 했다고 한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묘한 진동 같은 소리를 계속 들었는데.. 자꾸 <아루나찰라>라고는 속삭이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후에 집에 놀러온 친척이 부모님과 잡담하는 중 아루나찰라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놀라 그 친척에게 물었더니 산 이름이라고 한다이후 벵카타라만은 그 산에 들어가서 평생 살게 된다.


고등학교 때인가 영어 숙제하다가 멍 때리고 앉아 있는데형이 곁에 와서 공부 안한다 구박을 했고 이에 오래 전부터 마음먹고 있던 가출을 단행한다형이 자기 대신 학교에 내달라고 부탁했던 대학 등록금을 들고 튄다. 친척에게 들었던 아루나찰라 산을 물어 물어 마침내 찾아내고, 산중턱 쉬바 신을 모시는 사원에 들어가 몇 날 몇 일을 앉아 있으니까 그 주변으로 추종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
이력을 보면 불교 전통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적이 없는 사람이고타밀 지방에서 태어나 타밀 어 경전을 읽고 죽을 때까지 쉬바 신을 경배하던 구루다그런데 읽으면서 직지인심 견성을 추구하는 선불교나 금강경이랑 겹치는 부분이 많다이 책 한 권으로 판단해볼 때 이 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탐구.

너 자신을 알라’ 또는 책이 아니라 너 자신의 마음이 최고의 텍스트다라는 주의이다궁극적으로는 '나'의 소멸인데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며심지어 그 목표에는 이미 모두가 함께 도달해 있으니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도달한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위의 작은 따옴표 안의 말은 내 해석이고 마하리쉬가 직접 한 말은 아님.)



의도적인 행위가 없을 때 까르마의 톱니바퀴는 맞물려 돌지 않는다.. 

또한 붓다의 가르침이기도.



직지인심. 내 마음이 최고의 공부 텍스트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난 '나'라는 글자에 초점이 잘 맞지 않고 읽히지가 않는다.




마하리쉬는 굳이 출가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어느날 문득 다 익은 과일이 쩍 갈라지듯이 깨달은 이라 그런가 호흡법이나 만트라, 화두 참선 따위의 특별한 수행법도 없었고, 다만 니가 하고 있는 걸 지켜보라 사실 그것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흐름이 너의 것도 아니며 그저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 어디에서 흘러나오나 깨어서 지켜보라고 한다.

주의를 단단히 붙들어놓지 않으면 TV 채널 돌리듯이 마음의 시선은 이미 미끄러져 다른 데로 향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無我무아>라는 말 대신 <非我비아>라고 번역해서 쓰는 게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 내 것이라 생각해왔던 어떤 것을 두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라고 되뇐다,

 스스로를 맑히는 의식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걸, '사띠'라고(팔정도의 '정념', 또는 '잊지않음' 인데 구체적으로 잊지 않아야 할 어떤 기억의 컨텐츠를 가리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1차적 의미에 집착하는 건 어폐가 있는 듯...) 칭해도 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불교적인 재해석이고, 마하리쉬는 전혀 다른 전통(?)에서 말하고 있다.




에고의 본질은 '나와 어떤 대상의 동일시'다. 


이때 동일시라는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항이 존재하는데, 광고의 작동 원리와 유사하다. 이를테면 매력적인 K- 아이돌이 치약을 선전하면, 그 아이돌의 속성과 치약의 속성은 전혀 무관함에도 그 치약은 불티나게 팔리게 된다. 인간 일반의 좀비 근성인데,모든 인간에게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차지하는 비중을 달리 할 뿐 이런 좀비적인 근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매개항을 '욕망의 삼각형'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단지 의식주와 같이 육체적 필요를 넘어서는) 주관적인 모호한 기분에 감싸여져 있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하게 되지만, 뚜쟁이는 '맥락없이 지각되므로 무반성한 찰나에' 반드시 개입한다. 나의 경쟁상대이거나 나의 선망상대 (처음에는 부모, 멋있는 선배, 스승, 아이돌, 셀레브리티, 고위직과 수상자라는 껍데기 이미지)가 취하려고 하는 대상을, 그 대상의 본질이나 기능적인 필요와는 전혀 무관하게 욕망하게 된다. 이것이 가치를 분배하는 간잽이와 사회성이 양성되고 작동하는 방식이고, 내가 없는 데서 '나'를 구축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에고는 반드시 어떤 페티쉬의 표적 대상과 연관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소유권의 대상이거나 웰빙의 환상, 나의 피부존재를 가리킨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피부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매력적인 피부이며 미학은 이 피부를 대상으로 작동하고, 유미주의는 경제와 힘의 논리를 배제한 일종의 피부숭배이다.) 욕망의 대상과 나의 '연관'이 마치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양 뒤치닥거리하듯 문서나 미디어, 마음 속에서 변명을 덧붙이는 게 우리의 이성이다. 순발력이 높은 이성이 변명도 잘한다.

그저 쓸데없는 물욕, 명예욕(=아상) 일 뿐인데.. 달리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다 놓고 빈둥거리면 어쩐지 쓸쓸해지고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일찍 늙어버릴 것만 같고 기운도 빠지니까 남아도는 에너지로 뭐라도 붙들고 시도 해보게 된다.

단순히 그걸 game일 뿐이라 여겼다 하기엔 너무 불타고 있는 중이었다.

뼈와 살을 갈아 넣는 게 '로망의 증명'이 아닌가 하며.




금강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중생이라는 것은 사실 중생이 아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중생이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보살행을 하면 

그이는 이미 보살이 아니다..  

'위없이 높은 깨달음'(아뉴타라삼먁삼보리)의 경지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지위고하가 없어진다고 한다.




'절대적인 평등성'를 기반으로 해서 '깨달은 이는 오직 남을 위해 행위한다'라는 증상. 


이러한 회심 또는 전환은 착한 척 하느라 코스프레 하는 것도 아니고 

위선적인 이타주의를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흘러 넘친다고 하던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도 견성 경험 직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서술한 바 있다. 보살(보디삿트바=깨달은 존재) 행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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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 개정판
월폴라 라훌라 지음, 전재성 옮김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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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반쪽 짜리 만족감을 주는 책이었다.
오히려 추천을 한다면 월뽈라 라훌라의 다른 저서
<나라고 할 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라는 책을 꼽고 싶다.

역자 전재성의 과욕 덕문에 폼이 어그러진 역저라고 본다.
역자는 원저에서 분량이 두배로 늘어났다며
공저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머릿말에서 눙치는데,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세 번째 개정판이라고 한다.

주가 과도한 건 아니지만 6장 팔정도 부분과
7장 윤회와 무아의 장 초반부에서 역자가 가필하고 보완한 부분은
분명 원저자의 투명하고 간결한 문장과 차이 나는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을 전재성 씨가 썼다고
정확하게 특정하진 않았지만, 티가 난다.

원시불교의 안내서에 <청정도론>을 끌어와
7각지니, 선정의 9단계 따위를 굳이 겉핥기식으로 거론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그것도 선명한 느낌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다른 책에서 보여졌듯이 전재성 님의 문장은 이렇게
의미의 초점이 뭉툭하고 흐릿한 데가 있다.

이미 앞에서 각주를 달았던 내용을 또 달기도 하고,
책 후반부로 갈수록 오탈자도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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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알아야 진짜 인생이다
주세규 지음 / 북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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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한 훈계조의 글모음. 말 안들으면 지옥간다는 위협이 통하는 시대에는 읽혔을 듯. 타이틀을 수식하는 카피 문안으로 ‘천고의 진리‘ 타령이라니 깨어있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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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 - 개정판
광명 만덕 & 자재 만현 지음 / 현지궁현지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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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무당 부부의 혹세무민 쓰레기책. 불교판에서도 이런 것들이 많다. 국평오들이 많아 곧잘 속아넘어가 천도재 명목으로 돈도 갖다 바친다. 종교사업이라 세금도 안낸다. 제삿발, 굿발이 안들어 고소해도 결과를 보증하지 않은 합의로 보고 검찰 수준에서 기소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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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 2023-07-09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의 블루오션 틈새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