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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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에서 나왔고 배수아의 독일어 중역이다.

공교롭게도 동일한 원작에 대하여, >연금술사<라는 신생출판사에서

공경희 번역으로 비슷한 타이밍에 나왔다. 그건 영어 중역.

알라딘에서 미리읽기가 가능해서 번역을 비교해보고 배수아의 문장을 골랐다.

역시 소설을 열 권 이상 쓴 단련된 작가라서 그런가 문장이 안정감 있고

특유의 몽롱하면서 내성적인 문자향이 느껴진다.

비슷한 길이의 짧은 문장 토막으로 나뉘어 단조로운 듯 규칙적이며,

뿌연 안개를 미덕으로 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들려준다'.

반면 언뜻 훑어보긴 했지만 공경희 판은, 리듬감은 약간 떨어지지만,

좀 더 분명한 태도로 사태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영미권 작가의 번역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든다.

문장 호흡도 상대적으로 더 길지만

낱말들의 순서와 관계가 잘 조직되어서 쉼표를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읽힌다.

공경희 번역본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건 그 출판사의 첫 책이기도 한데,

편집부에서 상당히 다듬었겠지. 가격은 2000원 정도 공경희 판이 더 비싸다.

대신 골판지 표지에 실로 꿰매놓은 듯한 질박한 빈티지의 책 디자인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고, 류시화와 미국의 모 평론가의 해설이 붙어 있다.

 

내용은 기대보다는 유독하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음울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읽으면서 카프카와 E.T.A 호프만이 떠올랐다.

페르시아 문학 쪽의 영향은 내가 읽은 게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인생을 가차없이 부정하는 잠언 형태의 초반부와

중간 중간에 깔아놓은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하나로 꿰매지면서

몰아치듯 중첩되는 끝부분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희귀한 개성이 느껴졌다.

중간 토막에서는 간혹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들이 텐션을 떨어트리고,

예상을 뛰어넘지 않는 에피소드에서 늘어지기도 해서, 그때 어조도 찡찡댔다.

뒤에 붙은 연보를 보니 이 작가, 집안도 명문가고

어렸을 때 유럽유학도 다녀온 선택받은 인텔리였다.

엔지니어링 공부하라고 유학 보내놨더니 학교는 일찍부터 작파하고

시, 소설 나부랭이나 읽음시롱 돌아댕기다가

빠리에서 자살시도를 했지만 살아났다.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강에 뛰어들었는데,

마침 다리 밑에 보트 타고 연애 중인 커플이 있었던 것이다.

보트의 남자가 당장 뛰어들어 그를 구했다.

그 즈음부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듯하고,

거의 10년이 지나서 인도 여행 중에 원고를 마무리 했다.

지인들 사이에서만 도는 개인적인 복사본 형태로 먼저 유통되었던 듯 하다.

1903년생인 작가는 1950년에 빠리에 다시 가서 가스 틀어놓고 자살했으니까,

한국 나이로 치면 마흔여덟 살, 요절도 아니다.

그 사이엔 집안 사람들이 소개시켜주는 말단 행정직이나 은행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오늘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기반했던 페르시아 문학과 예술이,

특히 시와 조로아스터나 수피즘으로 대표되는 영적인 텍스트들이

좀더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터키어는 이난아 씨같은 분이

독보적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 옆 지역에서 샘솟는 풍부한 문화적 자원을 옮길 수 있는 인재가,

아직까지 한국에는 없는 듯 하다.

특히 중세부터 이어지는 그 방대한 시문학들을 읽고 싶다.

허페즈나 오마르 카이얌. 

괴테의 <서동시집>도 여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번역된 포르그 파로흐자드도 임팩트가 상당했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의 두 번역본은 첫 문장부터 느낌이 아주 다르다.

 

공경희씨가 '궤양'이라고 번역한 것을, 배수아는 '나병'이라고 옮겼으니까.

배수아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타인들은 결코 그런 고통을 믿지 못하고 정신 나간 이야기로 치부할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 고통에 대해서 묘사하거나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의 태도를 따라서, 혹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 섞인 경멸의 웃음을 지으며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아직 인간은 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술을 마시고 망각해버리는 것.

혹은 아편이나 약물에 취해 인공적인 잠에 빠져드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고통은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 더욱 격렬한 형태로 되돌아오고 만다.

잠과 의식 사이에 있는 황량한 지대,

혼수에 빠진 영혼이 겪는 그림자의 세계,

그 초자연적인 체험의 비밀을 인간은 밝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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