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2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동물입니다무엇일까요?”

시집을 펼칠 당신은 타이틀의 물음에 궁금하고 설렘이 있나

모르는 무엇에 질문으로 파지하면 그것은 

전진하는 플러스 알파’(잉여)가 된다. 

의미망 속에서 좁혀드는 가능성이자 불확실성이며,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닦달(das Gestell)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이장욱 시의 맥락에서는 이 표제어가 

맥 빠진 도발에서 오는 유머 감각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수렴하는 시의 회전축은 (권말의 에세이를 잣대로 댔을 때

<판옵티콘의 동물원>이지만

조교하는 지배자가 적이 되는 타겟으로 따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      <원숭이의 시>



원숭이의 내면은 기분전환 꺼리를 찾는 구경꾼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으로 검게 색칠되어 있다.

어둠 저편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긴 팔.

액션 이전에 놓인 진심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가짜 진정성.

불쑥 튀어나온 한밤의 그것은 

사랑 보다 오히려 격렬한 것.



*

<생활 세계에서 춘천가기>라는 시. '생활 세계'는 생활 세계의 시설과 용품용어들과 병렬되었을 때 이물감 없이 녹아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관념이 아닌 미결정 복합물을 지향하는 관념적 핀셋이 춘천의 산과 호수할인마트가 있는 일상 풍경 사이에서 출몰하는 것이다에드문트 후썰이 실증주의자연주의과학적 객관주의라는 가스라이팅으로부터 터전 속의 우리를 지켜내야 한다며 내세웠지만그 또한 현상학이라는 관념의 바운더리이며 유행을 타는 지성사의 철 지난 다른 이념어 표지들과 쭈뼛쭈뼛 뒤섞여 있다이것도 유머.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유물론이 옳았다.”

-      <생활 세계에서 춘천가기>



죽어가는 시절의 고독과 사후의 무심을 뒤로 하고,

모순 병존의 시적 신비로 건너뛴다

이미지 속에 건설된 종착지.

비록 그 건설을 비변증법적인 일이라고 자평하지만

순간의 직관처럼 정확한 일’이며 예고 없는 번쩍임.

낮잠에서 깨어난 오후이기도 하다.

한낮의 잠이었지만그 잠으로부터 깨어난 오후는

잠 속의 낮과 찰나의 사이를 두고 매우 다르다.



*

<경복궁>에서 두 인물 형식과 창식은 불가사의하게 마주친다살고 싶지 않지만 전화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창식과 죽은 사람과 병원에서 대화하는 형식이허공에 욕설을 퍼붓는 제3자의 오인(형식->창식)으로 맺어진다이어서 눈귀코입과 웃음과 울음까지 막히는 버스 안 창식이 우연히 내다본 경복궁이라는 이미지 매개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곳은 멋진 곳'이라고 전화 목소리로 들려주는, 형식에 대한 초대버스 창유리를 가운데로 두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조우하는 모티브가 키에슬로프키의 영화 <베로니끄의 이중생활>을 연상케 한다



*

주거지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란

주방에서 타오르는 프라이팬에 손을 얹는 일

프라이팬은 지옥이고

지옥이 그토록 가까워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서 

-      <주거지에서의 죽음과 행정적 처리들>



전쟁은 기사로 읽는 먼나라 소문이고 달군 프라이팬은 손끝에 닿기 전까지는 남의 일이다그러나 삶은 외상 죽음으로서, 근저에 있는 지옥의 가능성을 예의를 갖춘 채 뒷걸음질치고 외면하고 못본 척할 뿐, 대개는 분할 상환으로 무명= 내핵의 크기에 비례해서 이자까지 쳐서 갚아 나간다희로애락의 헛소동 속에서 늙고 병들고 마멸해가는 필연성에 대하여 인지적 혼동을 일으킨다. bio-graphy란 미련의 즙을 발뒤꿈치로 길게 끌면서 남기는 하나의 궤적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실내 온도를 맞추고마지막 통화를 하고관의 재질을 선택해야 한다.”)


왜 어떤 삶에는 의심할 것이 없고심층도 없다고 하는 것일까장소성과 물질적 질감이 상실된 관찰된 세계’만 남아있기 때문이다전시된 조각들의 깔맞춤을 욕망하면서 맺어지는 동물원- 상호교차 판옵티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SNS로 강화된 비교시기의 증식시에서는 결과값으로서 산포된 하나의 공기층만 형성되었을 뿐 그것을 낳은 기술적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여기서 우리는 흙 위에적어도 이장욱의 시에서는 두 발 딛고 서 있지 않다. (“중력이 다 소모되어서 둥둥떠오르는 사람들” <중력의 소모>)


자폐적으로 순환하는 몽환적인 이미지들이 오려진 골판지처럼 등뒤를 감추고 벽면에 붙들려 '둥둥 떠 있는’ 식이다(감시와 통제일방적인 피해자/가해자 구분이 드러남이 없이다같이 온화하게 낙하하는 낙조의 부정성으로 범벅이 되어인간인지 뭔지도 모를 얼굴 없는 존재로 액화되고 영겁회귀하는 생활의 경로들은 철학(개념)의 경계설정으로 테두리 짓기 좋게 되어 있다.

그러다가 문학으로는 아이러니, 또는 종교적 직관과도 같은손잡이처럼 그려졌지만 그걸 손잡이로 볼 수 있는 걸까 의심이 생기기도 하는 이미지로서 문득 응결이 된다. (쿠자누스가 계시의 본질이라고 말했던 반대되는 것들의 조우’ coincidentia oppositorum, 엘리아데가 끌어와서 부연 설명한 신화적 패턴’. ‘반대oppositorum’를 모순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계시는 비변증법적.)



이곳은 물속이 아니라서

그게 싫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여고생은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와 동반자살을 약속하는데..”

     -        <미해결의 장>



동반자살은 한여름에 물 속에서 내리는 ‘뜨거운 눈송이’로 응결된다. 과잉 긍정성의 시각적이고 표면적인 흐름으로 가득한 시뮬레이션 세계에서는 탈출구가 그것 뿐인가?


권말엔 동물원의 시라는 에세이가 있다작가에 따르면 동물원은 죽음의 완고한 코어를 드러내는 세계다. ‘동물들의 살기독기자포자기로 가득한 불결한 금속 정글이 삶의 본질인데 인간세에서는 평등-마취 후 반짝 가루로 치장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장욱의 동물원은 졸라의 본능적 자연주의의 필드도 아니지만코제브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가와이한 유희놀음 난장으로 모두가 거세되는 동물원의 비유와도 다르다고 구분짓는다.


변증법의 작동에는 외부가 없다. 역사의 완성이 프로이센으로 끝나는 헤겔에게 그렇듯이소비에트로 완성되는 레닌에게 그렇듯이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자유 시장경제와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최신 버전인 내파/함몰 implosion의 변증법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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