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이제니 지음 / 창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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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      <페루>



말의 공기돌 놀이, 허공으로 던졌다가 손등으로 받았다가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바닥을 지나 산도(産道) 같은 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것도 그것 대로 좋다 세계의 끝에서 먼지의 춤을 관찰하는

귀퉁이에 틀어 앉아 구체성이 결여된 삶.

화자는 스스로를 '발 없는 새'로 비유하며 

쉬고 싶다, 기대고 싶다 뇌까리지만

그가 거한 장소는 또아리를 튼 이불 속, 세상을 외면하는 골방 안이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 <페루>


내 머릿 속은/ 반은 쑥색이고 반은 곤색이다

쑥색과 곤색의 접합점은 성홍열 같은 선홍색” - <아마도 아프리카>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나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몸으로, 벌거벗은 마음으로 (..)

나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  어떻게 하면 기체나 액체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사라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실행에 옮기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도 없으면서, 그저 무심코 손톱 끝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무의미한 습관처럼

-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



반추상의 색채 배열을 투과해서 

기포처럼 수증기처럼 불안과 망상의 언어를 짜내고 있으니 

물질세계와 공회전하며 죽음을 유예할 뿐 그 자리는 충분히

최종적으로 기댈만한 곳은 아니다.


*


혼몽 = 균열된 나가 또다른 나와 악수하는 곳. 

도플갱어를 마주치더라도 꿈 속

둘 중 하나가 살해될 필요는 없다.

비스듬히 마주칠 뿐. 비껴갈 뿐 

다가가도 어렴풋한 거울 속에서처럼 미끄러질 뿐.



말 없는 자매들처럼 돌아누워 나누는 애도의 목례

검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는 이름 하나를 흘려쓴다.

(..)

고개를 돌리면 작고 둥근 흑점으로 번져가는 얼굴

나란히 누워 눈멀던 날들의 빛은 어디로 사라졌나

-      <단 하나의 이름>



소리 음가의 유사성으로 낱말들이 게걸음 치고,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한적한 한담의 한담 없는 밀물 속에..” -<피로와 파도와>)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걸린 듯한 언어의 성긴 거미줄 사이에서 없는 그곳’. 


호명으로부터 언제나 비껴서 있지만, 비껴나 있음을 네가 앎으로써 

딱 그만큼만 가늠해서 다시 짐작해 보는 그이.. 

발설하지 못한 이름 ’, 혹은 우리’. 

깃들 예정의.. 맞잡은 두 손이 다 내 것이기에 허공만큼 껴안은 그 곳.



얼어붙은 종이 위에서 나는 기다린다

얼음의 결정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물처럼

발설하지 않은 이름을 대신할 풍경이 몰려올 때까지

(..)

수면양말에 담긴 너의 두 발은 틀린 낱말만 골라 디뎠지

이 곳은 너무 어둡고 너무 환하고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흰색을 이 검은색을 고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고아에게

오늘의 심장은 어제의 심장이 아니란다

(..)

아득히 맴도는 이름: 너를 부를 때마다 고통을 느낀다

흑연의 어조로 닳아가는 이름: 우리는 함께 혼자였다

입속에 숨겨온 이름: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아껴야 했다

(..)

이대로 얼마나 오래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을까

고개를 돌리면 작고 둥근 .. ”

-      <단 하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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