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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렌탈
사토 야유코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대보다 훨씬 지적이고 드라이한 어조를 지닌 소설이었다. 짐작컨대 작가 개인의 트라우마와의 싸움이었던 듯하다. 그런 것 치고는 어조가 안정되어 있고 우울증 때문에 고갈되거나 삭막한 바닥을 드러내며 허우적대지도 않으며, 선악구도를 이분법으로 가르고 가해자 고소로 폭주하거나 냉소나 비아냥 포인트에 있어서도 울컥해서 치솟는 법이 없다.
주인공의 기행, 또는 자발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 버티고 있는 캐릭터의 컨셉은 자신을 구매하는 남자들에게 몸을 대여해주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비운다는 것, 정신과 육체의 커넥트를 끊어 마음을 사막화하고 일체를 유희화하는 훈련이다. 단순히 콜걸 호사담이 아니었고, 주인공이 대학 1학년이라 의외로 대학생다운 고민들, 주변부로 밀려난 친우들 간의 어우러짐에 비중이 있다. 요란하게 티를 내지 않지만 다들 곱게 자라 귀티나는 화족 자제들 같기도 하고, 적어도 빈한함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던 중산층 이상의 출신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저평가받은 소설인 듯. 단 주제를 마무리하는 데는 소설 분량이 애매해 보인다. 주인공녀가 '짐승'이라고 불리우는 인도철학 전공남이랑 여행 떠나는 이벤트로 갑자기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양식적인 수법이라서 어색하지는 않지만, 환부에 반창고 붙이기식 대응에서 더 나아간 바는 없어 보인다. 클리셰로 눈앞을 가리고 포맷하려 들지도 않고, 주의깊게 스스로를 억제한다고 보일 수도 있겠으나 쓰다 말았다는 점에서 어쩐지 전체 분량에서 반쪽만 내놓고 마무리한 물건 같다. 이후 작품들에서 어떻게 이 필생의 테마가 풀어 헤쳐졌을지궁금하다. 90년대 중반, 27세에 완성한 데뷔작이다.작가는 2013년, 사망한지 삼개월쯤 지나고서야 자택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97년 초판으로 나온 걸 읽었는데 촌스러운 문학사상사 답게, 별 필요도 없는 해설을 두 편이나 앞뒤로 붙여놨다. 엿보기와 선정성으로 호객행위를 해놓고, 단순히 에로물이 아니다 라는 듯 어설픈 현학의 수사로 치장을 해놓았다.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출판사의 병맛 취향 중에 하나인데 원작에 없는 부제를 매 챕터 마다 앞에 붙여놨다는 것, 이를 테면 '1장 내 육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2장 인간은 사랑의 오염된 산물'.. '11 뒤집어 놓은 인간성'...이런 식으로 모던 걸의 권리선언인 양 꾸며놓아 오히려 작품의 격을 떨어트렸다. 알라딘 중고로 구해놓고 오랫동안 읽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이 촌스러운 소챕터 카피 문안들 때문인 부분도 있는데, 책을 읽기 전에 수정 테이프로 모조리 지움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쿨한 게 뭔지를 모르는 노인들이 하루키 소설들에도 그 짓거리를 해놨지.)
번역은 비교적 깔끔하다. 몇 가지 눈에 띄었던 흠을 지적하자면, 본서 116페이지에 주인공이 미도리 상과 함께 간 여행지를 '미도'(尾道)라고 표기했는데 '오노미치'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히로시마현에 있는, 시가 나오야나 하야시 후미코 소설 등에도 나오는 세토나이 해를 면한 항구도시다. 150페이지의 맨 아래에 언급된 '한스 베르멜'은 성적이고 기괴한 구체관절인형 제작으로 유명한 독일 조형예술가 '한스 벨머 Hans Bellmer'를 가리킨다. 벨머가 천착한 성적인 강박관념은 이 작품의 테마와 합류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184페이지에 언급된 <사랑의 폭풍>이라는 영화는 '아이노 아라시(愛の嵐)'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다. 원제는 'Il portiere di notte'(the night porter), 한국어로 하면 '밤의 접수원'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엉뚱하게도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영어제목 porter 때문인가?) 더크 보가드, 샬롯 램플링 주연에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의 다크하지만 숨은 보석이다. 주인공은 호텔에서 밤의 야간 접수원이지만 전직 나찌 SS 장교였다. 여주인 샬롯 램플링은 수용소에서 그에게 sm 조교를 당하던 여자였는데 전후, 회사 중역의 부인이 되어있었고 우연히 이 둘은 호텔에서 마주친다. 역시 성적학대와 애증의 관계라는 점에서, 딱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가긴 하지만 소설의 메인 테마와 결부되는 부분이 있기에, 독자들이 연관 관계를 알 수 있도록 각주를 달거나 제목을 바꿔서 옮겨주는 게 옳다.
대학생들 간의 대화 중에 수전 손탁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인물들의 여행지가 근대일본문학의 배경지와 겹치기도 하는데, 그걸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배치해놓았기 때문에 뜯어 읽는 게 필요하다. 무라카미 류 풍의 세기말적인 스타일도 깃들어 있고 아무튼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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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벨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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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벨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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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벨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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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접수원 원작 포스터, 1974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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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아이노 아라시(사랑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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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요상한 제목으로 17년 정도 늦게 개봉했는데
그나마 편집이 누더기가 되서 상영되었죠.
(거기 털까지 전라에 sm은 기본이고 사랑의 이벤트 앞에서
선악을 떠난 양가적인 뒤얽힘이 있어서 일반 관객에겐 불편하게 읽힐만한 부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