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행동중심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루리. 낭만주의 시 강의를 듣는 여학생과 놀아나다 그녀의
아버지, 그녀의 남자친구, 그들의 학교 위원회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든 채 양심과
말에 대한 결벽증을 내세우다 그만 허리가 부러졌다. 성격은 곧 운명이다. 추락의
운명은 그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미지근한 어항 속,
뻐끔대는 금붕어 모냥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내 앉아 있는 자세가 지겨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성적이고 자유주의자여서, 역사의 흐름이라든지 타인과 상처받은 동물의
고통에 대한 필요이상의 유추를 통해 감정의 혼란을 사서 겪지 않는다. 하지만 딸
루시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 잘리고 루리는 그녀의 외진 농장
으로 갔고, 얼마 안되어 흑인들의 습격을 받는다. (전직 교수님의 머리위론 메틸알
코올이 퍼부어지고 레즈비언 딸아이는 윤간당한다.) 그녀는 수치스러우나 지지 않으
려 한다. 대지에 뿌리내리고 사는 데에 강한 고집을 보여준다. 반면 시와 여인네들
의 향그로운 꽃내음을 맡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던 이 남자는 부레옥잠같은 마음
자세로 반백년을 떠내려온 셈이다.

절구통같은 허리, 꾀죄죄한 옷차림에 더이상 손질하지 않는 총채같은 머리 모양을
한 베브 쇼 여사. 그녀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루리는 회생불능한 개의 허벅다리에
사망선고를 주사할 적에 '안전하게' 놈을 붙들고 있는 따위의 간단한 작업들을 돕게
된다. 이 남자는 동물애호가가 아니다. 다만 검은 비닐봉다리에 담겨져 쓰레기 소각기
안으로 줄줄이 사라져 들어가는 빳빳한 개 주검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애도하는 역할
을 한다. 모래 먼지가 풀풀날리는 남아공의 시골 마을, 어느 늦은 오후 이 남자는
장난감 벤조를 띵깡거리며 이제는 아무도 읽지않을 코메디 소품의 한 구절을 구상
하는 중이고, 강아지로 환생한 절름발이 바이런은 이 남자 주변을 깡총거리며 맴돈다.


소설 표지의 광고 카피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인종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문제의식이
라든지 달착지근하고 뻔한 휴머니즘같은 건 작품 내용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페미니즘, 동물 애호나 생태주의 등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서사들에 대한 삐딱
한 시선이 느껴진다. 주인공인 반백의 루리 씨에 대해서 풍자적으로 객관화하는 측
면도 보이지만 작가의 감정이입이 느껴지는 부분도 없는 건 아닌 듯 하다. 광기나
엉뚱한 모험, 낭만적인 폭발이라든지 혹은 구성이 화려한 이야기구조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짧고 생략된 문체와 상상하게 만드는 더 많은 여백에서 박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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