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꽉 막혀서 움직일 수 없다. 답답하다. 시체의 산을 밟고 질겅거리는 신발밑창의 느낌
을 가늠하며 균형잡고 있다. 뭐 그런 느낌을 떠올리면 한자로 '울鬱'이 되겠다.

'가축들에게는 배합사료로 충분하다' 따위의 시원시원한 문장들이 휘날리지만, 어쩌
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만은 가축이 아니라는, 막연한 안도감을 전제해두고서
이리라. 또 가축이면 어때? 혹은 가축이 아니라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따위
가망없는 공회전이 뇌사 직전의, 거품을 무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야간엔 빵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지역 동인지에 낼, 거의 아무도 읽지 않을 습작들
을 써갈기는 히비키라는 청년이 있다. 청년은 스타킹을 쓰고 아파트 옥상에서 여고생
을 항문으로 범하고 컷터날로 항문 옆 2cm 정도 거리를 두고 상처를 내어 쭈고리고
앉을 때마다 벌어진 딱지 틈으로 비린 피냄새를 풍기게 하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없
다. 교외 공동묘지 묘석 위에서 여자가 위에 앉는 자세를 감행하며 밑도 끝도 없는
철학적인 사변들을 주고 받는다. 마누라를, 그녀가 브라질에서 가져 온 철제 십자가
끝으로 때려 죽인다. 천식기가 있는 여고생에게 물침대를 사 준다. 싱긋 웃는 장면에서 끝,

뭐 대충 그런 내용이다.

요즘은 절판되서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왠지 더 귀중하게 생각되어, 헌 책방에서 사
놓았다가 어제 저녁 완독했다. 뻔뻔스러운 오버액션 투성이의 소설이다. 게다가 위악
스러운 방황이라든지 알듯 모를듯 추상적인 개념들을 나열하는 시궁창 성자식의 행태
도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개폼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무라 모씨의 소
설들에서 나타나는 종교적인 재능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적어도 나의 독서 범위 내에
서는 흔치 않은 것이다. 아쿠타카와상 수상작인 <게르마늄의 밤>같은 경우는 훨씬 압축
적이고 문장의 세련됨이랄까 긴장감이 뛰어난 소설이었다. 위악의 서사에도 뻔한 스
테레오 타입이 있고 나름대로 마이너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임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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