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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마징가 ㅣ 담쟁이 문고
이승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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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면면 쓸 수 없는 얘기가 있다.
흔히 말하는 '내 살아 온 얘기를 책으로 엮으면 12편 한 질로도 모자란다' 의 피상적인 개념과는 다른 완전히 그 시간에 녹아 눅진히 달라붙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쓸 수없는 이야기.
보통 '실화'라고 말한다.
실화는 남이 내 얘기를 듣고 옮기는 것과 내가 직접 기술하는 것은 천지차이라 생각한다.
물론, 글이라는 것이 같은 내용이라도 쓰는 기술이 얼마나 탁월하느냐에 따라 뽀대나는 책이 되기도 하고 거지 같은 책이 되기도 하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쓸 수없는 현장의 파닥거림게 살아 있으려면 내 이야기는 내가 적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안녕, 마징가>는 현장의 시큼한 땀냄새가 배여 있다 못해 맺힌 땀방울들이 뚝! 떨어지는 것 까지도 슬로우 비디오로 보여주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표지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보니 학교 다닌시간, 군대 복무를 빼고는 공장에서 살았단다. ( 그 뺀 시간이 얼마나 긴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두 해 공장 밥 먹은 걸 가지고 쪽팔려서 어디가서 '살았다'는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개그 프로 옌벤맨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구내식당 일 년치 식단표를 구구셈 외우듯 줄줄 외고 있고, 철커덕 기계 멈추는 소리만으로도 어디 부서 몇 번째 라인이라는 것 쯤 알아맞혀야 '쟈래 공장밥 좀 먹었구나야..' 하는 게 이 업계 정설로 알고 있다. (경험이냐 묻지 마시라. 나는 아니어도 같은 이불 덮는 사람이 같은 직종에서 20년 넘게 일하는 걸 보면서 알게 된 것이니)
작가가 직접 쓴 자신의 실화가 틀림없어 보인다는 말을 한다는 게 길어졌다.
각설하고,
<안녕, 마징가>는 놀랍게도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담쟁이 문고다. <'담쟁이문고'는 실천문학사에서 펴내는 청소년문학선 입니다>가 책 뒷날개에 시퍼렇게 박혀있다.
아, 이게 청소년 대상 소설이었구나...책을 덮으며 알게 되는 순간 헉, 싶어지면서...청소년에서 바로 일반인으로 뛰어 넘기전에 읽으면 좋을 "과도기문고"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사실이 말이지 고등학교 때 까지의 우리 삶은 재미있는 모든 것은 금기시 되고 재미없는 것들만 강요받던 억압과 착취(?)의 시간이었지 않았나?
그런데, 딱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준비도 없이 '이제 성인의 반열에 등극시키노라 금기시 되던 모든 것들을 해제 시키노니 알아서들 즐겨라' 하는 분위기니 얼떨떨해 하다가 보면 어느새 '멀 수록 더욱 둏타'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게 된다. 세상에 대한 신뢰를 금방 잃어버리게 되더라는 말이다.
이럴때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가기 전에 읽으면 좋을 <과도기문고>같은 게 있으면 아, 세상이 이런곳이구나.. 장미빛은 아니로되 뛰어들만 하구나..따위의 내공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가져야 할 바른 몸가짐 뿐 아니라 갖가지의 아프니까 청춘이더라 식의 경험담들을 망라한 과도기 문고 (활성화를 위해 과도기문학상 같은 걸 내 걸면 더 좋고)가 있어 성인이 되는 게 훨씬 수월했어요하는 후기를 들을 수 있는 책들로 채워진 문고! 그런 책들 사이에 이 책을 끼워 두고 싶다는 게 두서 없는 글의 요지다.
또 각설. (오늘 각설할 일 많다. 반성.)
공고 3학년 2학기!
아직 학생이긴 하지만 실습이라는 이름으로사회로 발걸음을 내딛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학교 선생님과 공장 사람들을 교차 시키며 세상의 흐름에 대해 인간 사이의 질서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문장으로 담담히 기술해 나갔다.
인도에 심어진 플라타너스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자들이 우리한테 손 흔들며 인사하는거 안 같나?"(P.100)
친구들에게 묻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무슨 까닭인지 마징가 선생에게 개 맞 듯 맞고 지냈지만, 학교라는 든든한(?) 울타리에서 거칠것 없는 세상으로 방목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랐다. 이제 안녕,이다! 마징가도 학교도... 플라타너스가 그렇게 인사하는 걸 정민이는 보았던 건 아닐까 싶어졌다.
지랄맞은 학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짜든동 한 달 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으로 실습을 나간 경산의 자동자 부품 공장에서 1년 6개월을 근무하게 되는 정민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세상에 눈을 떠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간다.
치기어린 생각없는 행동보다 성실과 책임이 주는 신뢰가 나를 만들어 간다는 걸 친구 한직이를 통해서 배우고 짝사랑의 아픔과 노조농성장에서 조차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는 성장소설이다.
육두문자와 경북 대구를 대표하는 사투리가 난무해 수도권 사람들이 읽으면 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까 싶어지는 대목도 많았지만,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 책을 읽으면서도 옆에서 대화하는 걸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꼈다.
성석제의 여러권의 소설속에 경북 상주의 사투리들이 잘 녹아 있어 지방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투리의 대가라 일컬어 지는 만큼 이승현도 이 책에서 경북 대구 사투리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 줘 대구 사투리의 보고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것 같은 책이기도 했다.
작고 어렸던 한 공돌이의 지난날들 (P.285)이라고 작가는 책 마지막에 적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작고 어렸던 시간들을 견디며 지나왔고 공돌이로 보냈든 귀공자로 보냈든 그 시간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 시간동안 만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미래의 나를 키울 수있는 어떤 것들을 배웠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 삶이 뽀대나거나 찌질했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다행이자 슬픈 일이다.
펄떡이는 현장의 모습과 담담하 시선으로 적은 공장의 비주류들의 삶, 그 안에서 어린 내가 커가면서 느끼는 사소하지만 귀중한 깨달음들,웃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을 넘기고 있는 이야기의 재미,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게 되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잘 버무려진 괜찮은 소설이다.
청소년 소설이라 했는데...열여섯 딸 아이에게 이걸 읽어보라고 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것 만 빼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