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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길고 긴 시간이었다.
이 한 권을 읽는데 3개월이 족히 걸렸으니!(화장실에 두고 깊은 시름에 잠길 때만 읽었다.)
100년 전 유럽 르네상스를 이끌던 문화계 주류의 사람들을 알아가고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사생활을 통해 지금은 전설이 된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지인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산 책이었다.
기라성 같은 유럽 당대 최고의 문화계 인사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우리가 드러나 알고 있는 업적을 포함 숨은 비화와 일화들을 감정을 배제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쓴 짧은 단신들로 구성되었으나 두께감 있는 책.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인 발칸전쟁이 한창인 불안의 시대에 예술을 통해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문화를 꽃피운 예술가들을 만나게 해줄 타임머신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시대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인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고 숨겨 놓은 일기장을 펼쳐보며 위대한 예술가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 애정을 갖게 되겠구나 싶어지긴 했다.
하지만, 나처럼 인문학적 지식도 100년 전 시대에 대한 이해도 깊지 못한 청맹과니 독자가 읽기엔 만만찮은 책이었다. 소개되는 인물들 중에는 이 양반이 작가인지 의사인지 화가인지 이름조차 생소한 사람들도 있었고 모르는 그 분들이 던진 얘기들이 그 당시에 왜 이슈가 되고 기록이 되어졌는지 배경지식이 없어 이해되지 않는 장면도 많았다.
책 띠지에 적힌 17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고 지난 몇년간 본 책 중 가장 흥미로운 문화사였다는 추천말은 사람을 주눅들게 하다 못해 내가 이렇듯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인간이었나?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그래도 화장실에 갈 때 마다 3개월에 걸쳐 마지막장 까지 읽어 낸 것은 개인적인 인문학적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애쓴 자그마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대견스럽기도 하다. 음화하화----^^
아는 사람 얘기가 재밌듯이 익히 들어와 귀에 익은 사람들 얘긴 제법 재밌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홋, 하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가령 아돌프 히틀러가 수채화가여서 그날 그날 그린 작품을 싸게 팔아 생활을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과 토마스 만이 커밍아웃을 할 뻔 하고, 사라진 모나리자 그림이 어떻게 도난 당했다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 쇤베르크가 연주회에서 따귀를 맞는 상황과 클림트가 자원해서 옷을 벗고 모델로 나서주는 여인들 사이에서 즐겁게 작업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 알마와의 불안한 사랑을 표현한 코코슈카의 대작 - 바람의 신부
그 중 제일 재밌게 읽은 것은 화가 코코슈카와 미망인 알마의 이야기였다.
코코슈카의 알마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기행, 그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게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다 결국은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 헤어지고 다시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한 알마의 팜므파탈적 일화. 한때 클림트와도 연분이 있어 이탈리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는 알마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여인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팜므파탈이긴 하나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미인이었다.
알마의 화려한 남성편력과 반대로 스토커 수준의 집착과 편집증을 보인 코코슈카는 알마의 결혼으로 충격 받아 군에 입대 후, 1차 대전에 참전하고 뇌손상을 입는다.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등신대 인형을 제작해 마차에 태우고 다니고 드레스도 주문해 입힌 것은 물론, 침대에 눕혀 함께 자고 증오심이 생기면 때리기도 해 이웃이 시체와 사는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 했다는 기행적 일화가 잊을만 하면 등장해 또 어떤 얘기가 나오나 궁금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코코슈카의 공이크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코코슈카는 여전히 남의 여인이 된 알마를 사랑했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다고 한다. 불쌍한 코코슈카!)
업적이 뛰어나고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더 부각시키지도 않고 미미한 존재라고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은 깔끔하고 담담한 서술이 이 다소 지루한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 힘으로 느껴졌다.
1913년 유럽의 내로라 하는 예술계의 인사들을 헤쳐 모여! 시킨 뒤 방대한 자료들을 압축시켜 펴 낸 1년 치의 신문을 구독한 기분이다. 내 얕고 좁은 인문학 수준을 각성케 해 준 책이기도 하다.
깊고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위해 한 번 더 읽어보면 어때? 한다면 그냥 얕고 좁은 지식을 유지하며 차츰 배워가겠다는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읽어야지.. 싶지만 읽어 지지않는 책은 화장실에 두면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다 읽게 되더라는 게 내 독서법 중 하나다.
다음은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인데 누굴 향해 던지면 흉기 수준의 두께이고 항해 동안의 건조한 기록물이라 다 읽기까지 한 1년 걸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