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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이념을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나아갔거나 후퇴했고,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의 실현되는 이상향의 세상을 위해 지금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있다.
몽매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지금보다 더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의식의 전환을 꾀하는 이념무장이다. 왜 싸워야 하고 무엇때문에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고 이기기 위해서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 있어야함을 상식으로도 알 수있다.
그렇지만,
이념이라는 거창한 형태의 생각에는 관심없이 제 앞에 놓여진 삶만을 위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세 끼 밥 잘 먹고, 내 새끼 내 형제가 편안하고, 이웃끼리 잘 지내며 하루하루 안분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념'이라는 금 앞에 세워두고 너는 어느편이냐? 종용한다고 해서 그어진 금만큼이나 뚜렷한 이념이 생기는 것일까?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 듯, 아무런 이념없이도 생명을 유지해 가야할 수 많은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념 없이도 무슨 무슨 주의 없이도 잘 살아온 사람들이 편 갈린 이념으로 인해 물결에 휩쓸려 표류하고 난파당하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면, 이건 누구의 책임일까?
이념없이 살아 온 무지랭이 민초를 탓해야 할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분명한 이념가들을 탓해야 할까?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답이 여전히 의문부호로 남아있는 만큼 격랑의 시간속에 새겨진 한맺힌 아픔은 아픔대로 오롯하게 남아있다.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조선 인민군 우편함 4640호>
이 편지들은 발신인의 손을 떠나서 격랑의 시간을 62년 간을 표류하다 발신인의 손에는 끝내 닿지 못한 채 이 책안으로 정박하고 있다.
엽서를 포함한 113통의 편지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면회를 가겠으니 기다리라는 아내의 사연이 있는가 하면 , 집 세간에 연연해하지 말고 몸이라도 어서 피하라는 다그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있고, 떠나와 있을 지언정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애틋한 연서에서 부터 결혼날짜를 받아 놓았으니 속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편지도 있다.
쓴 장소도 사연만큼이나 다양해서 평양의 관리가 요동성의 애인에게 , 모스크바의 아내가 평양의 남편에게,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 흑룡강성, 산동성, 블라디보스톡에서 보낸 사연들도 보였다.
정돈된 글씨로 깨알처럼 편지지를 가득 메운 형식에 맞는 편지가 있었는가 하면, 빛바랜 종이와 고쳐 가며 쓴 비뚤한 글씨, 사모하는 마음을 얹어 그림을 곁들여 쓴 편지, 위문편지를 쓴 아이들 편지, 편지가 어서 가서 님의 손의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편지들로 가득하다.
1950년에 보내진 편지들이라 6.25전쟁이 발발했거나 발발하기 직전의 편지들에 담긴 사연들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돌아가고픈 보통의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아이들 목숨만 붙어놔주시요, 발싸게, 난닝구, 반소데 삿쯔를 속히 가지고 와주시길, 끗트로 악수 키수, 자식을 서이나 전선에 보낸 우리 어머님,토기 두 마리, 돼지 두 마리 모두 데리고 큰집에 와 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끄집어 낸 제목만 읽어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어떻게 살아갈 사람들이었는지를 짐작할 수있어 코끝이 시큰해 진다.
이 편지들은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로 미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평양을 비롯해 북한 지역 전역에서 노획한 문서라고 한다. 비밀로 분류된 후 누구나 볼 수있는 공개 문서가 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대부분의 편지는 손 댄 흔적이 없어 사연들이었다니 사연의 일부를 공개해서라도 수신인에게 편지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이 책이 나오는데 한 몫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쓴 편지이다.' '이건 내가 받았어야 할 편지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명만이라도 나선다면, 그래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이 책이 출판된 소임을 다한 것이라는 펴낸이의 글을 읽고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수신인이나 발신인이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 표류하던 세월을 건져 올릴 수만 있다면, 이 책속에 담긴 113통의 주인공 모두가 다 위로 받을 수 있을텐데...싶은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들이고 누렇게 변색된 비뚤한 글씨들이지만, 애틋함이 뚝뚝흐르는 사연들을 읽다보면 사상이라는게 이념이라는게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을 피폐하게하며 피어난 허울뿐인 꽃은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