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프네를 죽여줘
플로랑스 멘데즈 지음, 임명주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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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의 트라우마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던 25살 다프네 플로레스는 두 차례의 자살 시도에 실패하자 다크웹의 청부살인 커뮤니티를 찾습니다.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인 건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초보 킬러 마르탱 마르텔. 그런데 마르탱은 어처구니없게도 엉뚱한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현장을 목격한 다프네는 자살에 대한 확신이 흔들립니다. 더구나 열흘 안에 의뢰가 완수되지 못하면 다른 킬러가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할 거라는 마르탱의 말에 다프네는 패닉에 빠집니다. 다프네는 자신이 정말 죽고 싶은 건지 전문가와 상담하고 싶어졌고 인터넷에서 심리치료사 모나 샴스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모나는 사이코패스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정폭력, 트라우마, 우울증, 자살, 청부살인 등 암울하고 어두운 소재들로 뒤범벅된 이야기지만 마치 속사포 같은 만담을 들으며 초고속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한 아찔한 쾌감과 프랑스 문학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선정성과 범죄스릴러의 긴장감까지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폭력적이면서 유머러스하고, 거칠면서 동시에 감동적이다.”라는 한 줄 평이나 “광기와 유머가 동시에 번뜩이는 사이코 범죄스릴러”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는데, 아마도 자폐스펙트럼과 우울증을 극복하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청부자살까지 결심한 다프네와 그 청부를 받아들인 마르탱은 사실 무척이나 닮은꼴입니다. 유년기부터 정신적, 육체적 폭력에 시달렸고, 성장하면서 왜곡된 가치관에 사로잡혔으며, 지독한 자기혐오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에게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죽고 싶은 자’와 ‘죽여야 하는 자’로 만났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죽고 싶은 건지 고민되는 자’와 ‘죽이고 싶지 않은 자’로 생각을 바꾸면서 예상치 못한 열흘의 동행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이코패스인 환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의사 자격을 박탈당한 심리치료사 모나가 끼어들면서 세 사람은 묘한 연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설령 다프네가 살겠다고 마음을 바꾸더라도 또 다른 킬러가 찾아올 거란 사실입니다. 더구나 마르탱이 실수로 엉뚱한 여자를 죽인 사건이 경찰에 포착되면서 다프네와 마르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인물들의 캐릭터나 설정된 사건들만 보면 이야기가 절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프네가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을 것 같지도 않고, “그날 이후 마르탱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엔딩은 더더구나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청부살인조직과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 이상 분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면이 불가피해보였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심리치료사 모나 역시 ‘선한 중재자’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아서 과연 어떤 파격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다만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경고장’에서 작가가 “인생은 가끔 우리를 골탕 먹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언급한 점을 머릿속에 담아둔 덕분에 이 작품이 그저 지독한 씁쓸함과 불편한 여운만 남기지는 않을 거란 걸 예상할 수 있었고, 여러 차례의 반전 끝에 도달한 마무리에선 새삼 작가의 ‘경고장’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습니다. 


264쪽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지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면서도 냉소와 실소를 번갈아 경험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엔 안타까움과 안도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다프네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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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씩 짝을 지어 주세요
기나 지렌 지음, 이상연 감수 / 그래비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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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사립 야사카 여고의 졸업식 날 아침, 3학년 담임교사 스즈타 아사미는 27명의 학생을 상대로 마지막 ‘특별수업’을 선포합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짓는 게임을 거듭 벌이며 홀로 남게 된 학생을 차례로 ‘실격’시키다가 마지막에 남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만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실격’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교사의 발언을 만우절 농담처럼 여기던 학생들은 실제로 눈앞에서 죽음이 벌어지자 충격과 패닉에 빠집니다. 더구나 이 ‘특별수업’이 ‘집단 따돌림 없애기 캠페인’의 대상 학급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이내 게임은 시작되고, 짝을 짓지 못한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 기나 지렌이 (‘서점대상’과 함께 제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영화 ‘배틀 로얄’을 연상시키는 데스 게임 스릴러라는 점입니다. 다만 졸업을 앞둔 27명의 학생들에겐 그 어떤 무기나 흉기도 주어지지 않고, 그저 두 사람씩 짝을 짓는 단순한 게임만 부여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게임의 밑바탕에 왕따와 집단 따돌림과 학교폭력이 깔려있고, 교실 카스트, 즉 야비하고 잔인한 계급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배틀 로얄’ 이상의 서늘함과 광기를 내뿜습니다.


최후의 생존자가 결정되는 순간까지 20여 명의 학생들은 끔찍하게 목숨을 잃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릴 뿐입니다. 사적 복수 코드가 가미된 데스 게임 스릴러라면 죽음의 순간을 최대한 세밀하게 묘사하며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기나 지렌은 이 작품의 작의인 ‘무의식적인 악의에 의한 왕따와 그것이 초래한 비극’에 초점을 맞추며 왜 27명의 학생들이 이 잔혹한 게임을 치러야만 하는지를 짧은 챕터들을 통해 군상극처럼 그려나갑니다. 특히 피라밋 형태의 교실 카스트가 어떻게 ‘무의식적인 악의’를 양산하고 비극을 극대화하는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눈길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게임이 거듭될수록 누구와 짝이 될 것인지, 누구를 ‘실격’시킬 것인지 치열한 계산과 연대와 배신이 난무하는 가운데 교실 카스트가 역전되는 상황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역전은 단순히 통쾌함을 위한 설정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악의’의 민낯을 까발리고 악의의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좀더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평소 ‘유령 같은 존재’로 취급되던 학생이 전략적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장면은 집단 심리의 잔혹함과 동시에 그 취약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진면목 중 하나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수업’의 유래라든가 학생들이 기괴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등 호러 판타지의 묘미까지 품고 있어서 더 매력적인 이 작품은 왕따, 집단 따돌림, 학교폭력의 문제를 데스 게임에 대입시킴으로써 같은 주제와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꽤나 진한 씁쓸함과 여운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하지만, 나이와 성별과 계층에 관계없이 이 문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번역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 왜 출판사에서 ‘번역’이 아니라 ‘감수’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으면서 여러 곳에서 답답함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딱히 오타나 비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심심찮게 목격됐는데, 그게 저만 느낀 문제인지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인지를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들을 통해 꼭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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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엄마가
일리아나 잰더 지음, 안은주 옮김 / 리드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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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매켄지는 유명 스릴러 작가였던 엄마 E. V. 렌지의 느닷없는 죽음에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애정보다는 증오와 미움이 더 강렬했던 탓에 슬프기는커녕 추모식조차 귀찮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다만,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는 아닌 것 같다는 석연치 않은 의구심이 남아있었는데, 추모식 당일, 엄마가 쓴 편지가 도착하면서 매켄지의 일상은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며칠에 걸쳐 연이어 도착한 편지에는 지금껏 몰랐던 엄마의 불행한 젊은 날들은 물론 그녀가 실은 한 차례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들이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켄지는 남사친인 EJ의 도움을 받아 엄마의 과거를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립니다.



부모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아무래도 약간은 지루하지 않을까, 진부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듭니다. 도무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심리 스릴러 또는 다소 뻔한 도메스틱 스릴러에 머무는 경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최근 이런 선입견을 제대로 깨뜨린 작품들을 연이어 읽게 됐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야마구치 미오의 ‘금기의 아이’가 그랬고, 처음 그 이름을 알게 된 작가 일리아나 잰더의 ‘사랑을 담아, 엄마가’는 다분히 막장 가족극에 가까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전개와 연이은 반전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계속 긴장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명 스릴러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지만 가족에겐 그저 냉랭하기만 했던 엄마가 실은 지독하게도 불행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낳았으며, 어쩌면 여러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 (편지를 다 읽고도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게 된 매켄지는 대혼란 속에서도 엄마의 과거를 알아내기로 결심하지만, 우여곡절과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그 여정 속에서 매켄지는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던 엄마의 진실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여전히 반쪽짜리일 뿐이었고, 더욱 더 거대한 비극이 매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엄마의 편지를 여러 차례에 나눠서 매켄지에게 보내는 정체 모를 자의 의도, 매켄지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여기는 형사, 엄마의 과거를 캐는 자신을 못 마땅히 여기는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21년 전의 엄마를 알고 있는 듯한 몇몇 인물들의 수상쩍은 태도 등 매켄지는 엄마의 과거를 조사하는 와중에 여러 차례 의문과 혼란에 휩싸이곤 합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반전이 중반부쯤에 배치된 탓에 내용에 대해 언급하기가 무척 어려운 작품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초중반부를 지날 때쯤 그 반전을 예측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 지점부터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며 본격적인 스릴러 서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1년 전의 사실을 그린 두 번째 챕터부터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반전은 앞서 말한대로 다분히 막장 가족극의 냄새를 피우긴 하지만, 작가는 ‘막장도 제대로만 활용하면 멋진 소재가 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론 ‘웰 메이드 막장’이야말로 모든 독자와 시청자가 바라마지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중반부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반전’을 모르고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자 서평 가운데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반전을 공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듯한데, 가급적 아무 정보 없이 이 매력적인 스릴러를 만끽하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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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의 아이
야마구치 미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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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 시민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다케다 와타루는 한밤중에 실려 온 익사체를 보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얼굴과 체형 모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기 때문입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다케다는 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기노사키 교스케에게 자문을 구하고, 두 사람은 익사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조사를 시작합니다. 얼마 후, 다케다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을 가까스로 찾아내지만, 그 사람은 만나기로 한 당일,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생사가 갈리는 현장이자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극적인 무대이기도 한 병원에서 벌어지는 의료진과 환자의 분투는 그 어떤 픽션보다 묵직한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출간 당시부터 ‘금기의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아유카와 데쓰야 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서점대상’ 등 화려한 타이틀까지 지니고 있어서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격 미스터리와 메디컬 서사에다 출생의 비밀과 윤리적 문제를 포함한 사회파 휴먼 미스터리까지 곁들인 ‘금기의 아이’는 제가 좋아하는 병원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빠짐없이 잘 녹아있는 명품이었습니다.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익사체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다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연이어 마주칩니다. 돌아가신 부모가 감췄던 출생의 비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그 비밀 뒤에 감춰진 더 큰 비밀과 기구한 사연 등 다케다는 정체성과 자존감이 뿌리째 뒤흔들리고 맙니다. 

다케다의 비밀을 추적하는 명탐정 역할은 중학교 동창이자 소화기내과 의사인 기노사키가 맡습니다. 감정 자체가 휘발된 듯한 냉정한 캐릭터지만, 모두에게 ‘상냥한 의사’로 호감을 살 만큼 뛰어난 ‘위장술’도 부릴 줄 압니다. 명품 본격 미스터리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는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진상에 다가가는 압도적이고 매력적인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본모습, 즉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초반까지만 해도 다소 가벼운 톤을 유지하던 이야기는 밀실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 미스터리의 급물살을 탑니다. 이어 범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33년 전 벌어졌던 은밀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사건이 현재 벌어진 의문의 익사체 및 밀실살인과 연결되면서 다케다와 기노사키는 연이어 큰 충격에 빠집니다. 독자 입장에선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던 초반부를 지나자마자 그야말로 격류에 휩쓸리게 되는데, 이 격류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아주 잠깐의 ‘휴식’을 제외하곤 쉴 새 없이 새로운 사실과 단서들을 쏟아내며 거듭된 반전과 함께 무지막지한 속도로 흘러갑니다. 


내용에 대한 언급 없이 거의 인상비평 같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인물이든 사건이든 짧은 언급만으로도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스포일러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의 참맛을 맛볼 기회를 잃게 되므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급적 아무 정보 없이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본격 미스터리 애호가든 메디컬 미스터리 마니아든 누구나 재미있게, 또 묵직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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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메이든스 - 사람을 먹는 자들의 계보
로이드 데버로 리처즈 지음, 이동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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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주 일대에서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범인은 젊은 여성을 숲으로 유인한 뒤 살해하곤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것은 물론 시신 안에 돌 조각상을 넣어두었습니다. 사건을 맡은 FBI 과학수사연구소 수석 법의인류학자인 크리스틴 프루지크는 과거 자신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엽기적인 연쇄살인 수사에 나서는데, 사건 발생 5개월이 되도록 성과를 내지 못하자 지휘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범인이 체포되면서 수사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리스틴은 강렬한 위화감과 함께 진범은 따로 있다는 확신을 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틴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충격적인 가설에 이릅니다.


 

“고전 FBI 스릴러의 매력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스톤 메이든스’는 ‘양들의 침묵’, ‘스카페타 시리즈’, ‘링컨 라임 시리즈’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진범의 캐릭터는 한니발 렉터에 못잖고, 주인공 크리스틴 프루지크는 퍼트리샤 콘웰이 탄생시킨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와 많이 닮은꼴이라 그런 인상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범인의 시점을 번갈아 배치한 전개 방식 역시 정통 범죄스릴러의 공식을 그대로 차용했는데, 덕분에 고전미와 함께 서스펜스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살인과 훼손과 ‘돌 조각상 서명’이라는 엽기적인 범행은 지금도 크리스틴을 공황발작으로 몰아넣곤 하는 10여 년 전의 악몽과 꼭 닮아서 더욱 눈길을 끕니다. 대학원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시절 우연히 발견한 남태평양 부족의 엽기적인 풍습 - 무차별 연쇄살인에 이은 식인, 그리고 희생자의 몸에 돌 부적을 넣는 행위 - 에 관한 연구노트는 크리스틴으로 하여금 법의인류학자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은 물론 FBI 과학수사연구소 특수수사관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 연구노트를 본 크리스틴은 "원시사회에도 사이코패스가 존재한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살인욕구는 단순 문화에 그치지 않고 유전적인 요인도 작용하는 걸까?"라는 의문에 빠져들었고, 부족의 풍습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단독 탐사를 나섰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인디애나 주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과 마주한 크리스틴이 큰 충격과 함께 상부의 지시를 어겨가면서까지 집착에 가까운 수사를 벌이는 유일한 이유는 범행 방식은 물론 희생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방법까지 그 부족의 행태와 꼭 닮았기 때문입니다.

 

케이 스카페타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틴은 ‘FBI 과학수사연구소 수석 법의인류학자’라는 공식 직책이 무색할 정도로 현장을 누비는 형사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녀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휘두르는 가장 큰 무기는 과학수사와 프로파일링이지만, 뛰어난 직감과 꼼꼼한 현장수색과 날카로운 심문 능력 역시 그에 못잖게 중요한 무기들입니다. 앞서 줄거리에서 언급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충격적인 가설’에 이르는 과정엔 과학수사와 프로파일링보다 오히려 ‘보조무기들’이 더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입니다.

 

뛰어난 능력자지만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점, 자신을 몰아내려다 오히려 헛다리를 짚은 상부와 경쟁자를 물 먹이며 진범을 직접 체포하는 점,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 큰 도움을 얻는 것은 물론 로맨스의 분위기까지 풍기는 점 등 ‘스톤 메이든스’는 전형적이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다만, 교과서적이고 전형적인 서사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크리스틴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이끌려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거의 공식대로 흘러가다 보니 진범이 특정되고 사건이 종결되는 대목에선 오히려 긴장감이나 흥미가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별 1개를 뺀 유일한 이유인데, 막판에 신선한 반전과 함께 이야기를 한 번만 더 꼬았다면 고전과의 차별성도 살리고 이 작품 고유의 시그니처가 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그래도 예상밖의 에필로그는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이 작품 이후 11년만인 2023년에 후속작 ‘Maidens of the Cave’가 미국에서 출간됐습니다. 한국에 소개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법의인류학자 크리스틴 프루지크의 활약을 한번쯤 더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사족 : 간혹 뜬금없는 오타 때문에 책읽기를 멈추곤 했습니다. 이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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