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도사 ㅣ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2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과 그의 딸 막달레나, 그리고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는 코프마이어 신부의 독살 사건을 조사하던 중 ‘템플기사단의 보물’에 관해 알게 됩니다. 지몬은 신부의 여동생 베네딕타와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찾기 위해 바바리아 주 일대의 성당과 수도원을 뒤지고 다닙니다.

한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수도사들이 지몬과 베네딕타의 뒤를 집요하게 쫓습니다.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여러 개의 난해한 수수께끼를 푼 끝에 지몬과 베네딕타는 보물의 위치를 파악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을 쫓던 검은 수도사 일행과 마주치고 맙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은 여러 경로로 들어온 정보를 통해 사건의 윤곽은 물론 지몬과 베네딕타가 큰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됩니다. 서둘러 보물이 묻힌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야콥 퀴슬은 그곳에서 지몬과 베네딕타, 딸 막달레나와 극적으로 만나고,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놓고 검은 수도사들과 마지막 일전을 벌입니다.

 

중세라는 시대적 공간은 상반되는 두 가지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하나는 문명의 개화나 과학의 발달이라는 밝고 긍정적인 면이고, 또 하나는 마녀사냥으로 상징되는,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한 본능적이고 잔혹한 면입니다. 픽션의 무대로서의 중세는 이런 양면성으로 인해 호기심과 기대감을 유발하는데,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는 문명과 원시의 대립 또는 혼재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사형집행인의 딸’이 연쇄소년살인과 마녀사냥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면, 이번 작품은 템플기사단의 보물을 둘러싼 어드벤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더 가벼웠다면 ‘인디애나 존스-사형집행인 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검은 수도사’는 제목이 주는 느낌 그대로 목숨을 건 잔혹한 보물찾기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전설적인 보물,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단서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격전을 벌이는 주인공과 악당들, 그리고 그 와중에 알콩달콩 벌어지는 3각 로맨스 등 할리우드 식 보물찾기 모험물에 어울리는 맛깔난 코드들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덧붙여 대를 이어 천대 받아온 사형집행인의 비애와 피로 얼룩졌던 종교 갈등 등 중세만의 독특한 사연들이 함께 버무려져 있어서 영화 소재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구성 면에서는 세 주인공(야콥, 막달레나, 지몬)의 동선을 흩어놓고 각자 상대해야 할 악당을 설정함으로써 긴장감과 위기감을 고조시켰습니다. 지몬과 베네딕타가 전형적인 주인공 역할을 수행했다면, 야콥 퀴슬은 본연의 사형집행인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동시에 정보전을 진행했고, 야콥의 딸 막달레나는 원톱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독자들에게 사건의 큰 그림을 소개했습니다. 주인공들이 ‘따로 노는’ 전개가 부담스러운 전략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모두 함께 보물찾기에 나섰다면 무척 지루한 전개가 됐을 것입니다.

 

캐릭터 역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전작에 비해 노련하고 유연해진 것은 물론 영리하고 대담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변신’은 첫 편을 읽은 독자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야콥 퀴슬은 원래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거칠고 원시적인 매력이 강한 캐릭터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거세’된 반면, 지혜롭고 부드러우며 심지어 정치적이거나 ‘착한 사형집행인’의 인상이 부각됐습니다. 첫 편에서 역할이 미미했던 막달레나는 가문의 유산인 야성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소란스러운 ‘왈가닥 캐릭터’가 된 듯 했고, 그녀의 연인이자 의사인 지몬은 전편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해진 나머지 검은 수도사 일행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척척 풀어내는 ‘인디애나 존스’가 돼버렸습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재미있게 달리긴 했는데,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전작인 ‘사형집행인의 딸’을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악당들의 캐릭터와 전략이 아쉬웠다”, “반전이 좀 밋밋했다”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검은 수도사’에서 느낀 허전함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우선 악당의 캐릭터와 전략의 경우 ‘보물을 찾겠다는 의욕은 넘치는데, 그것을 찾기 위한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안 되니 주인공들의 꽁무니만 죽어라 따라다니는’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악당들의 행태는 본문 속에서 “지몬과 베네딕타는 누군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식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문제는 이런 문장이 여러 챕터에 걸쳐 반복되면서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점입니다.

반전의 경우 ‘템플기사단의 보물’에 관한 것 외에는 대체로 중반부 쯤 눈치 챌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작품 자체가 반전보다는 모험물에 방점이 실린 작품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더 잘 감춰뒀다가 나중에 빵~ 터뜨렸다면 후반부의 긴장감을 훨씬 고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적정선보다 조금 넘쳐 보이는 분량,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수수께끼들,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을 위해 작가가 베푼 과도한 친절 - 생각지도 못한 도움의 손길이나 막다른 상황을 타개해줄 단서가 수시로 출현하는 - 등이 읽는 내내 아쉬움을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보물찾기 모험물이라는 대중적인 재미에는 충실한 작품이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문명과 원시가 공존한 중세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것은 물론 작품 곳곳에서 목격되는 작가의 꼼꼼하고 방대한 자료조사 덕분에 중세 독일을 직접 여행한 듯한 시각적인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만나게 될 사형집행인 일가족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악당들과 마주칠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더 거칠고, 본능적이고, 중세적인 캐릭터가 부각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그 시대에 걸맞는 적절한 잔혹함도 함께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는 두 편 정도가 더 출간됐다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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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리스트 - 연재물을 쓰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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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러 필명으로 포르노부터 SF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3류 연재물을 기고하는 해리 블로흐는 사형집행을 목전에 둔 희대의 연쇄살인범 대리언 클레이로부터 황당한 의뢰를 받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자신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여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 뒤, 자신과 그녀가 주인공인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노 대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10년 전 클레이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클레이의 변호사 캐롤은 즉각 사형집행을 유예해줄 것을 요구하고, 당시 클레이를 체포했던 FBI요원 타운스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희생자들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해리는 자신의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는 15살의 부잣집 딸 클레어, 10년 전 클레이에게 쌍둥이 언니를 잃었던 다니엘라와 함께 비공식 수사를 시작합니다. FBI의 미행과 정체불명의 괴한의 습격 등 온갖 고비를 넘긴 끝에 해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Serial Killer(연쇄살인범)의 포르노를 대필하는 Serialist(연재물 작가)의 이야기라 그런지 폭력성과 선정성에 있어서는 제가 읽은 작품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도 남을 만한 작품입니다. 연쇄살인범 클레이의 범행은 거의 난도질 수준이고, 해리가 대필하는 포르노는 ‘19금’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입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3류 연재물 작가 해리 블로흐를 비롯하여 어딘가 롤리타의 냄새를 풍기는 15살 매니저 클레어, 희생자의 동생이자 스트리퍼이며 해리와 로맨스를 나누는 다니엘라 등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또한 ‘연쇄살인범의 포르노 대필’이라는 선정적이지만 특이한 소재, 복역 중인 연쇄살인범과 동일한 수법으로 자행되는 새로운 살인, 그리고 10년을 복역한 사형수가 실은 무죄였을지 모른다는 의문 등 그야말로 재미를 위한 설정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형식이나 구성도 무척 독특했는데, 해리 블로흐가 다양한 필명으로 기고했던 여러 연재물이 액자소설처럼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극중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원색적인 상담코너인 ‘잡년 조련사’에서부터, 뱀파이어, SF, 수사물에 이르기까지 해리 블로흐의 연재물이 발췌되어 실려 있는데, 딱히 메인 스토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들은 아니지만 주인공 해리 블로흐의 ‘취향’과 작가 데이비드 고든의 ‘작가론’을 살펴볼 수 있어서 일종의 덤이나 부록처럼 소소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다 읽은 뒤 독자들의 평을 보니 조금은 호불호가 갈린 듯 보였습니다. “페이지가 안 넘어간다”, “반전이 무리하다”, “폭력성과 선정성이 과하다” 등이 비호감을 표현한 서평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 역시 조금씩이나마 동감하는 부분들이었습니다.

페이지가 안 넘어갔던 이유를 꼽자면 두 가지 정도인데, 첫째는 해리 블로흐의 발췌된 연재물들이 구성 자체로는 독특함을 지녔지만 내용은 ‘사족’처럼 느껴졌고 분량 역시 적잖이 할애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해리 블로흐의 입을 빌려 설파되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의 ‘작가론’이 다소 현학적이면서 동시에 강요하는 둣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재미나 재치의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반복된 점 역시 무리수였다는 생각입니다.

‘무리한 반전’에 관해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겠지만, 단서나 논리보다는 ‘깨달음 또는 우연한 연상’에 주로 의지하다 보니 독자에 따라 ‘과도한 비약’ 또는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또,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도 여러 차례 반전이 반복되다 보니 마지막 반전에 이르러서는 놀람보다는 ‘이건 사족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종합하자면, 욕심은 이해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던 것이 옥의 티랄까요? 발췌한 연재물도, 과도한 작가론도, 거듭된 반전도 대체로 적정량을 초과한 탓에 긴장감과 몰입감은 물론 페이지 터너로서의 힘까지 손해 본 게 아닌가,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신인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만한 아쉬움은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필력으로 볼 때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스토리 텔러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중년작가 해리 블로흐와 똑똑한 15살 부잣집 딸 클레어의 콤비 플레이 역시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매력적인 조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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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 개정판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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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월째 임신 중인 여인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유서 깊은 산부인과 가문 구온지家에 관심을 갖고 있던 3류 기고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고교 선배이자 괴짜 탐정인 에노키즈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난 구온지家의 장녀 료코를 통해 소문의 주인공이 그녀의 동생 교코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료코는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교코의 남편 후지마키의 생사 확인을 에노키즈에게 의뢰합니다.

에노키즈의 조수로 구온지家를 방문한 세키구치는 료코와 교코의 부모 등 관련 인물들을 탐문하며 사건 현장을 둘러보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찬 일기장과 단편적인 단서 외에는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천재 음양사 교고쿠도와 경찰 기바까지 개입하면서 20개월째 임신 중인 교코, 그 남편의 실종, 구온지家를 둘러싼 영아살해 의혹 등 일련의 사건들의 진상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냅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오래 전부터 구온지家를 짓눌러온 비극의 연장일 뿐이며,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다수의 참상이란 점도 밝혀집니다.

 

신(神) 또는 괴담이나 전설을 소재로 한 일본 미스터리는 명백한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꽤 읽어봤지만, ‘우부메의 여름’은 그중에서도 극단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엽기적인 사건이나 괴담을 소재로 3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주인공 세키구치부터 과거에 벌어진 일을 볼 수 있는 환시(幻視) 능력을 가진 괴짜 탐정 에노키즈, 세상의 모든 지식을 꿰고 있는 고서점의 주인이자 뛰어난 음양사 교고쿠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 무대인 낡고 오래된 산부인과 구온지家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독특하다 못해 기괴한 분위기를 내뿜는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초자연적 현상에서부터 뇌와 신경, 양자역학, 심리학 그리고 각종 종교적 논쟁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화려한 말의 성찬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논리적인 전개 따위는 깨끗이 무시한 채 수상하기 그지없는 궤변과 형이상학적인 비유가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신비한 주술과 주문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조차 호불호의 논쟁을 크게 일으켰다고 하니 한국 독자들에게서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고쿠도 시리즈’는 ‘우부메의 여름’으로 처음 읽게 됐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몇몇 작품들을 읽은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곳곳에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는 정체 상태와 마주치곤 했습니다.

 

겨우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 건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부터인데, 물론 여전히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지만, 오래 전부터 등장인물들을 옭아매왔던 비극적인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중후반부 이후에는 교고쿠 나츠히코만의 매력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후반 200여 페이지에 걸쳐 음양사 교고쿠도가 벌이는 다분히 주술적인 의식은 한 시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긴장감 있게 진행되며 대미를 장식합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불쾌감이나 이물감을 버리지 못한 독자도 적잖겠지만, 저 같은 경우 스스로에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어!’라는 주문을 걸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어느 시점인가부터 아무 생각 없이 활자에만 집중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사건과 진실, 이야기의 흐름에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이어질 ‘교고쿠도 시리즈’ 역시 이런 ‘독자의 자세’를 필요로 한다면 무척이나 피곤하고 가시밭길 같은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고쿠 나츠히코가 선사하는 마약 같은 유혹 역시 절대 포기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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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한 잔 ㅣ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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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지&제나로 시리즈’ 첫 편임에도 한국에선 후속작보다 늦게 출간된 작품입니다. 2009년에 출간된 작품을 이제야 읽게 돼서 한참 늦은 감은 있지만, 운 좋게(?) 후속작들 역시 읽지 않은 상태라 저는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비밀을 캐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갱단에게 위협받지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기어이 미션을 완수한다는 스토리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이고, 적절한 폭력성과 선정성이 가미되어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가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그리 거북하진 않습니다. 폭력적인 장면들이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그 역시 불편하진 않습니다. 켄지와 제나로의 캐릭터는 슈퍼히어로처럼 과장되지 않아 훨씬 인간적이고 정이 갑니다. 비아냥 또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동원된 유머들은 위트가 넘치고, 부패한 정치인, 잔인한 갱단, 노회한 언론인 등은 자신들의 캐릭터에 딱 맞는 어휘와 톤을 구사해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작품이 지녀야 할 여러 가지 미덕을 다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그저 신나고, 재미있고, 권선징악의 통쾌함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신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상처투성이인 캐릭터들 때문이었는데, 영웅으로 알려진 아버지로부터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물려받은 켄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제나로, 그리고 16살에 갱단의 두목이 되어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롤랜드 등 평범한 삶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내뿜는 원초적인 증오와 분노가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단순한 권선징악 이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한 흑백간의 인종차별 문제 역시 적잖은 분량을 통해 다뤄지는데, 어느 한쪽이 선하고 어느 한쪽이 악하다는 식의 얕은 수준의 이분법은 물론 근거 없는 적개심이나 동정심을 강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론 대신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의 선악”이라는 당연하고도 현실적인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여러 가지 가볍지 않은 설정들 때문에 보통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의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낄 수 있는 ‘머리가 싹 비워지는’ 쾌감 대신 이것저것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준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대체로 이런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남은 작품들 역시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제나로를 덮칠 생각만 하며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다가도 진정성 있는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로 변신하는 켄지를 보고 있으면 새삼 그의 뇌의 상당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트라우마가 더욱 안쓰러워 보입니다. ‘폭력의 달인’이면서도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했던 제나로의 변심은 통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켄지와 쌓아나갈 달달한 애정전선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해줬습니다.

서평에서 언급하진 못했지만 맛깔난 조연이자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 부바 역시 후속작에서의 활약과 함께 그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쓰다 보니 여러 가지로 기대할 것이 많은 시리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음식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한 권씩 그 맛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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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에피소드 S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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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인 ‘어나더’의 표지가 길거리에서 들고 다니기엔 영 부담스러운 정통 호러 풍이었다면, 속편인 ‘어나더 에피소드 S’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부담감을 줍니다. 여주인공 미사키 메이의 45도 프로필을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구성한 표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인형 갤러리의 지하실처럼 ‘빨아들이는’ 매력을 내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이목구비는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이고, 거칠고 날것 같은 머리칼과 그녀가 들고 있는 청회색 스케치북의 조합은 ‘어나더’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미사키 메이의 이미지 그대로였습니다.

 

본편인 ‘어나더’의 중후반부쯤 여름방학을 맞은 미사키 메이가 가족과 함께 잠시 요미야마를 떠나 별장에 다녀오는 대목이 있는데, ‘어나더 에피소드 S’는 그 시기에 미사키가 한 유령을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 설명에 따르면 제목의 S는 Summer(여름)이기도 하지만, Sitai(시체) 또는 Shinkirou(신기루)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의 주된 화자인 Sakaki(사카키)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카키는 1987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학생이었고, (‘어나더’에서 언급됐던) 수학여행 버스사고로 부상을 입은 뒤 요미야마를 떠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11년이 지난 1998년 5월 3일, 죽습니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자신이 살던 호반의 저택에 나타납니다. 자신이 죽은 이유도 과정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누나 부부에 의해 은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카키는 유령의 몸으로 저택 곳곳을 뒤지며 죽음의 진상과 함께 자신의 시신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던 중 가족 간의 인연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미사키와 마주칩니다.

사카키는 안대 속 의안을 통해 유령인 자신을 알아보는 미사키와 함께 자신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조금씩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동기와 과정을 알아내고 자신의 시신도 발견합니다. 하지만, 미사키를 통해 ‘유령’의 진실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들려줄까, 사카키바라 군? 네가 몰랐던 올 여름의, 또 한 명의 ‘사카키’ 이야기...”

 

이야기는 미사키 메이가 (‘어나더’의 주인공인) 사카키바라 코이치에게 별장지에서 만난 유령 사카키와의 기이한 인연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본편의 대부분은 유령 사카키의 독백형 1인극처럼 진행됩니다.

작가 스스로도 “당황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어나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어 무척 낯설기만 했습니다. 이 작품이 ‘어나더’의 속편이 아니라 독립된 유령 소재 호러물이었다면 아마 쉽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잘 해야 중편 정도의 규모인데다 마지막 반전을 제외하면 평범한 유령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유령 사카키가 1987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을 휩쓴 재앙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26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유산으로 고등유민처럼 유유자적 살아가는 외양과는 반대로 3학년 3반이 남긴 불행한 유산은 11년이 지나도록 사카키의 삶을 짓눌러 왔습니다. 기어이 그는 죽음에 이르렀고, 유령이 되어서도 ‘불행’에게 발목잡힌 처지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의 3학년 3반에 닥친 재앙에 관해 조언을 얻고자 미사키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사카키의 죽음의 진상과 멈출 줄 모르는 3학년 3반의 재앙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됩니다. ‘어나더’(3학년 3반의 재앙)와 ‘에피소드 S’(유령 이야기)가 결합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특히 1987년 여름방학, 재앙을 피해 자신의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과 사카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작품 속에서 꽤 중요한 소품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후반부에 밝혀지는 사진 속의 비밀은 사카키의 죽음의 동기는 물론 이 작품의 정체성, 즉 왜 이 작품이 ‘어나더’의 속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정은 ‘어나더’ 없이는 ‘어나더 에피소드 S’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는, 무척이나 역설적이고 곤혹스러운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는데, 대체로 속편이나 시리즈물의 경우 본편이나 전작을 읽지 않더라도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끔 ‘친절한 부연설명들’이 군데군데 삽입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나더 에피소드 S’는 본편인 ‘어나더’를 읽지 않고는 중요한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작품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기 쉽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광팬은 아니지만 ‘어나더’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 입장에서 ‘어나더 에피소드 S’ 자체가 가진 매력과 약점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의 재앙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게 되고, 살아남은 자 역시 남은 기억 혹은 잊힌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유령이라는 소재와 독백형 1인극 형식을 통해 구성한 점은 여느 호러물이나 미스터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이자 이 작품만의 매력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은 동시에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내용과 형식 모두 심하게, 조금은 현학적으로 보일만큼, 특이하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어나더’ 없이는 제대로 된 해석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작품 말미에서 아야츠지 유키토는 ‘어나더 에피소드 A’ 또는 ‘어나더 에피소드 S2’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는데, ‘옮긴이 후기’를 보니 올해(2014년) 가을부터 ‘어나더 2’가 일본에서 연재된다고 합니다. 말미의 단서대로라면 공간적 배경은 역시 요미키타 중학교가 될 것으로 보이고, 시간적 배경은 2001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사키와 사카키바라는 3년이 지나 대입시험을 앞둔 고3이 돼있겠지만, (물론 갑자기 10년 정도 건너뛰어 미사키나 사카키바라가 3반 담임으로 요미키타 중학교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연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국내에도 빠른 시간 안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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