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 전 한 잔 ㅣ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켄지&제나로 시리즈’ 첫 편임에도 한국에선 후속작보다 늦게 출간된 작품입니다. 2009년에 출간된 작품을 이제야 읽게 돼서 한참 늦은 감은 있지만, 운 좋게(?) 후속작들 역시 읽지 않은 상태라 저는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비밀을 캐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갱단에게 위협받지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기어이 미션을 완수한다는 스토리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이고, 적절한 폭력성과 선정성이 가미되어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가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그리 거북하진 않습니다. 폭력적인 장면들이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그 역시 불편하진 않습니다. 켄지와 제나로의 캐릭터는 슈퍼히어로처럼 과장되지 않아 훨씬 인간적이고 정이 갑니다. 비아냥 또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동원된 유머들은 위트가 넘치고, 부패한 정치인, 잔인한 갱단, 노회한 언론인 등은 자신들의 캐릭터에 딱 맞는 어휘와 톤을 구사해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작품이 지녀야 할 여러 가지 미덕을 다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그저 신나고, 재미있고, 권선징악의 통쾌함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신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상처투성이인 캐릭터들 때문이었는데, 영웅으로 알려진 아버지로부터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물려받은 켄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제나로, 그리고 16살에 갱단의 두목이 되어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누는 롤랜드 등 평범한 삶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내뿜는 원초적인 증오와 분노가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단순한 권선징악 이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한 흑백간의 인종차별 문제 역시 적잖은 분량을 통해 다뤄지는데, 어느 한쪽이 선하고 어느 한쪽이 악하다는 식의 얕은 수준의 이분법은 물론 근거 없는 적개심이나 동정심을 강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론 대신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인간의 선악”이라는 당연하고도 현실적인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여러 가지 가볍지 않은 설정들 때문에 보통 할리우드 액션물 스타일의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낄 수 있는 ‘머리가 싹 비워지는’ 쾌감 대신 이것저것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준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대체로 이런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남은 작품들 역시 기대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제나로를 덮칠 생각만 하며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다가도 진정성 있는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로 변신하는 켄지를 보고 있으면 새삼 그의 뇌의 상당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트라우마가 더욱 안쓰러워 보입니다. ‘폭력의 달인’이면서도 남편의 폭력 앞에 무기력했던 제나로의 변심은 통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켄지와 쌓아나갈 달달한 애정전선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해줬습니다.
서평에서 언급하진 못했지만 맛깔난 조연이자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 부바 역시 후속작에서의 활약과 함께 그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쓰다 보니 여러 가지로 기대할 것이 많은 시리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음식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한 권씩 그 맛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