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샤일록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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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중요한 초반 설정이 포함된 서평입니다.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에 이미 공개한 내용이긴 하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이 서평은 나중에 읽으시기 바랍니다.)

 

은행 입사 후 3년간 엘리트 코스를 밟던 유키 신고는 섭외부로 발령을 받자 당황합니다. 채권 회수가 주 업무인 섭외부는 공공연히 은행 내 ‘비주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직속상관이 된 야마가 과장은 ‘샤일록’(‘베니스의 상인’의 고리대금업자)이란 별명으로 얻을 정도로 채권 회수에 관한 한 무자비하고 냉혹하며 뛰어난 실적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유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회수 활동을 하며 유키는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진짜 ‘샤일록’ 같은 인물이지만 야마가에겐 돈과 은행에 대한 그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 코스만 바라보던 유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마가와의 동행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야마가가 칼에 찔려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경찰과 탐정 미스터리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던 나카야마 시치리가 이번에는 금융이란 테마에 살인사건을 접목시킨 독특한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은행원으로서 꽃길만 걷다가 채권 회수라는 ‘비주류’ 업무에 투입된 3년차 은행원 유키 신고와 ‘샤일록’ 혹은 ‘채귀’(債鬼)로 불릴 정도로 가차 없이 채무자를 압박하여 채권을 회수하는 베테랑 은행원 야마가를 앞세워 금융계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거기에다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를 얹음으로써 매력적인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금융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진정한 은행원으로서 거듭 나는 유키의 성장 스토리입니다. 유키는 생전의 야마가로부터 그리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진 못했지만 돈과 은행에 관한 그의 철학만큼은 제대로 물려받았고, 덕분에 그가 담당했던 채무자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채권 회수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그의 철학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됩니다.

또, 초반에 의외의 죽음을 맞이하며 조기 퇴장하긴 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거나 채귀라는 말에 화가 났나? 회수 담당자는 그런 말을 들어야 제 몫 하는 거다.”라는 명언을 남긴 야마가 역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였습니다.

 

주제와 캐릭터 모두 다소 모범적이고 묵직해 보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톤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형적인 스타일대로 무척 경쾌하고 스피디합니다. 유키가 상대하는 악성 채무자들은 히키코모리 주식투자자, 경영 마인드가 부족한 중소기업가, 무능한 2세 경영인,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 선거에서 참패한 전직 의원, 땅 투기에 실패한 야쿠자 등인데, 그야말로 악성 채무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온갖 부도덕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논리 가운데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준 은행을 탓하는 대목이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유키 역시 ‘악덕기업’으로서의 은행의 실상에 여러 번 분노하곤 하는데, 부실한 심사와 부적절한 커넥션으로 불량채권을 빚어낸 당사자가 은행이지만, 필요에 따라 당장 그 불량채권들을 회수하라며 직원을 압박하는 것도 은행이고, 막상 직원이 거친 방법으로라도 채권을 회수하려 들면 회사 이미지와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며 경고를 날리는 것도 은행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는 그리 큰 비중으로 그려지진 않고, 범인 역시 초반부터 대략 두세 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어서 긴장감이 덜 하긴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는 ‘반전의 제왕’답게 막판에 살짝 한 번 꼬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최종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유키의 몫인데, 결과적으론 그 추리 역시 야마가로부터 배운 교훈에 힘입은 덕분입니다.

 

독하고 세고 반전의 힘이 강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심심하고 밋밋한 건 사실이지만, 돈과 은행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건 의외로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빚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는 악성 채무자들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기어이 채권을 회수하고 마는 유키의 활약도 소소하긴 해도 적당한 통쾌함을 선사하는 재밋거리입니다.

 

사족으로... 나카야마 시치리는 인물 혹은 사건들을 서로 다른 작품에 교차 출연시키곤 합니다. 유키가 상대한 악성 채무자 가운데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가 있는데, 그 에피소드가 너무 낯익어서 예전에 써놓은 서평들을 뒤져보니 ‘다시 비웃는 숙녀’ 가운데 두 번째 챕터인 ‘이노 덴젠’과 연결된 에피소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시 비웃는 숙녀’를 읽은 독자라면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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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통행증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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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을 다룬 ‘미야베 월드 2막’에는 여러 시리즈와 주인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재진행형이며 가장 매력적인 건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괴담 들어주기’를 그린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라는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 덕분에 손님인 화자(話者)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하고 믿기 힘든 괴담을 편한 마음으로 털어놓습니다. 그 괴담들은 때론 안타깝기도, 때론 감동적이기도, 또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오랜 시간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바위덩어리를 치워버리거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영혼 통행증’까지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중 앞의 네 편은 17살 소녀 오치카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았고,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함께 괴담을 들었으며,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편 ‘눈물점’부터는 도미지로가 단독으로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눈물점’ 서평에도 썼던 내용이지만 도미지로는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다소 미덥지 못한 인물입니다.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하지 않은데다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아 손님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눈물점’에서 단독 데뷔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도미지로는 아직 초보 티가 여전합니다. 괴담을 들려줄 손님이 등장하면 바짝 긴장하기도 하고, 간혹 앞질러 이야기를 예단하다가 당황하기도 하며,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간이긴 해도 도미지로가 분명히 성장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는 오치카의 도움이 간절할 정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든든한 두 하녀 오카쓰와 오시마에게 기대지도 않습니다. 나름 쌓은 노하우로 대화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능력도 갖추기 시작했고, 들은 괴담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 역시 꽤 진지한 구상과 고민을 담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제법 청자(聽者)로서 틀이 잡혀 간다고 할까요?

 

모두 세 편의 괴담이 실려 있는데, 산 속 용암 연못에 기거하는 ‘터주’의 은혜 덕분에 화기(火氣)를 제압할 수 있는 신비한 ‘큰북 님’을 갖게 된 오카지 번의 이야기(‘화염 큰북’), 맛있는 꼬치경단을 파는 소녀 오미요의 안타까운 가족사(‘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영혼의 비극적인 사연과 그 영혼을 돌보며 마지막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뱃사람의 애틋한 기행(‘영혼 통행증’) 등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이 비교적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그린 반면, ‘화염 큰북’과 ‘영혼 통행증’은 괴담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화염 큰북’의 경우 용암 속에 살던 생물이 산 속 연못에서 ‘터주’로 추앙받으며 불기운을 좌지우지한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그 ‘터주’에 얽힌 놀라운 반전은 괴담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충격과 감동을 전합니다. ‘영혼 통행증’은 전형적인 ‘한 맺힌 귀신 이야기’ 같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뱃사람과 영혼을 볼 수 있는 15살 소년이 가세하면서 색다른 귀신 이야기로 장식됩니다.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클라이맥스는 카타르시스의 힘까지 담고 있어서 통쾌함과 애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작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야기의 결은 전혀 다르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자의 성실함과 진정성이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세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 기대보다 홀쭉했던 분량입니다. ‘편집자의 덧붙임’을 읽어보니 애초 여섯 편이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과도해지고 출간시기가 많이 늦어질 수 있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세 편의 연재가 일본에서 마무리됐고 한국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니 저의 아쉬움은 그런대로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년 봄쯤에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1.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의 괴담 자리가 3년 전에 시작됐다는 서문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저의 체감으로는 족히 10년은 된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찾아보니 시리즈 첫 작품인 ‘흑백’이 한국에 소개된 게 2012년 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미시마야에 또다시 3년의 시간이 흐르려면 앞으로 1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요? 부디 절반 정도로라도 줄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족 2. 미미 여사는 이 시리즈를 통해 모두 99편의 괴담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한 바 있는데, (편집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 통행증’까지 34편이 완성됐습니다. 딱 1/3 지점인데, 그저 미미 여사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남은 65편의 괴담을 빠짐없이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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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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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년 전,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의 중학교에서 30명의 학생이 사망 혹은 중태에 빠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동급생 우에다 유타로가 급식에 독을 탔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 사건의 트라우마가 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14살 아들 하루히코를 둔 이혼녀 가나에와 결혼한 시미즈 요시아키가 아사히가오카에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갑자기 14살 아들을 얻은 시미즈는 어떻게든 행복한 가족을 이루려 애쓰지만 학교폭력의 상처까지 지닌 하루히코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새 집 근처에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희생자들이 살았다는 점 때문에 걱정이 많던 시미즈는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 우에다 유타로와 닮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친구가 생겼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하루히코가 잦은 밤 외출을 하자 시미즈의 불안은 점점 증폭됩니다.

 

꽤 길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할 정도로 ‘목요일의 아이’는 무척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습니다. 학교와 가정의 폭력, 가족의 문제, 촉법소년이 저지른 과거의 끔찍한 대량살인, 그리고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를 다시금 두려움에 빠뜨리는 7년 전 사건의 공포 등 각각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만한 주제들이 한데 뒤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이야기 - 행복한 가족과 ‘좋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시미즈의 고민, 대량살인범 우에다 유타로의 7년 만의 출소에 때맞춰 아사히가오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의문의 사건들 - 가 메인인데, 양쪽 모두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자관계인 시미즈와 하루히코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루히코와 마음을 트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던 시미즈는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연루되기 시작하자 초조함을 넘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했던 하루히코에게 연민과 애정을 품었던 시미즈지만 끝내 하루히코가 감춰온 본 모습을 알게 된 뒤론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던 7년 전 사건의 한복판으로 달려들기로 결심합니다.

 

‘사건에 연루된 아들과 그로 인해 충격에 빠지는 아버지’라는 구조만 보면 우타노 쇼고의 ‘세상의 끝, 혹은 시작’, 할런 코벤의 ‘홀드 타이트’(구판 제목 ‘아들의 방’)가 언뜻 떠오르지만, ‘목요일의 아이’는 아버지 시미즈와 아들 하루히코 외에 제3의 주인공인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만의 작지 않은 영역과 주제를 품고 있어서 다소 복잡하고 난해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같은 반 친구들을 몰살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 “동기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고, 내 손으로 세상을 끝내고 싶었다.”는 궤변에 가까운 범인의 주장이 중반부 이후 이야기를 지배했고,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쳐놓은 정교한 덫에 걸려든 시미즈가 갈피를 잃고 허우적대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지의 통상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장르가 전개되는 탓에 솔직히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집요해 보일 정도로 자주 거론하는 ‘세상의 끝’은 이 작품의 여러 주제들 – 가족의 의미, 학교와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 대량살인범의 범행 동기 - 을 관통하고 있지만, 실은 그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자의적이어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또 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나름 거창한 집단살인극을 통해 세상을 끝장내버릴 것 같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의 초라한 엔딩 때문에 ‘세상의 끝’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치기 어린 황당한 궤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섞이기 힘든 주제를 한줄기에 엮기 위해 동원한 ‘세상의 끝’이란 개념은 오히려 이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그 개념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큰 그림이 너무 많이 흐트러져버렸다고 할까요?

 

‘역자 후기’에서라도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스포일러 때문인지 자세한 언급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그래도 이야기의 중심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의 고뇌와 싸움.”이란 설명 때문에 더 혼란만 느꼈는데, 그 설명을 받아들이자니 “그럼 그토록 강조된 ‘세상의 끝’이란 건 도대체 뭐지?” 라는 의문만 더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어떤 독자가 이 작품을 사이코 서스펜스로 분류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사이코 서스펜스로 절정을 달리다가 가족 드라마로 마무리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좋게 얘기하면 다양한 장르의 폭주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한 줄로 정리하기 어려운 복잡난해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 올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중반부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사건과 해프닝들이 꽤 많이 노출돼있습니다. 누가 죽고 누가 죽였는지, 또 어떻게 죽였는지까지 상세히 소개됐는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급적 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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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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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은 1994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입니다. 그의 작품 리스트의 기점이 1985년에 출간된 ‘방과 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초기작이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본격적으로 성숙한 작품들을 내놓기 직전, 그러니까 중견으로의 진입 시점에 발표된 작품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가 형사 시리즈’ 초기작이라든가 ‘숙명’ 등 매력적인 작품들을 내놓긴 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야기의 톤이나 중량감만 따지면 일상 미스터리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동원된 사건들은 살인, 강도, 절도 등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건은 지독한 악의나 소시오패스의 광기와는 거리가 먼, 다소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또 대단한 반전이나 정교한 미스터리 트릭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법한 현실적인 사건들’로 읽혔습니다.

 

동료들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집을 밀회의 장소로 제공해온 남자가 어느 날 아침 낯선 여자와 마주친 뒤 겪는 미스터리(자고 있던 여자),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한 남자에 대한 오랜 원한(판정 콜을 다시 한 번!), 성실함과 근면함의 두 얼굴을 그린 직장 미스터리(죽으면 일도 못해), 신혼여행 첫날밤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복수(달콤해야 하는데), 결혼 사실을 알려온 친구의 편지에 담긴 낯선 여자의 사진의 비밀(결혼 보고) 등 수록작 모두 독특한 설정의 미스터리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소소한 악의가 예상 밖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에피소드를 그린 ‘등대에서’였습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흥미로웠고, 반전의 힘도 꽤 강렬했으며, 단편만이 발휘할 수 있는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는 좀더 사건성이 강한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편이지만, 일상 미스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담담하게 그린 ‘수상한 사람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개성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단편집이라는 생각입니다. 독하고 강한 양념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30년 가까이 된 다소 쉽고 가벼워 보이는 미스터리가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매력과 미덕이 있는 작품집이니 오후 한나절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지고 싶다면 ‘수상한 사람들’도 좋은 선택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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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스트넛맨
쇠렌 스바이스트루프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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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으로 잔혹하게 폭행당한 뒤 신체 일부가 절단된 채 살해된 여성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코펜하겐 경찰 살인수사과의 나이아 툴린은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복귀한 마르크 헤스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참여합니다. 피해자들의 곁에 놓여있던 밤 인형(chestnut man)에서 1년 전 실종된 소녀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발견되자 수사는 혼란에 빠집니다. 사회부 장관 로사 하르퉁의 딸인 크리스티네를 납치한 범인이 이미 1년 전 체포됐고, 그는 시신을 토막 낸 뒤 숲에 유기했다고 진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굴러온 돌’ 헤스는 연쇄살인과 크리스티네 실종이 연관된 사건이라고 확신하지만, ‘박힌 돌’ 툴린과 1년 전 범인 체포로 큰 공을 세웠던 살인수사과 반장은 헤스의 추측을 무시합니다. 가까스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밝혀진 가운데 추가범행까지 벌어지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동안 북유럽 스릴러의 대세는 각각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덴마크産 스릴러의 출간 소식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는 ‘재미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란 타이틀까지 갖춘 덕분에 읽기 전부터 두툼한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남달랐습니다. 끔찍한 폭행 이후 산 채로 신체를 절단하고 시신 옆에 밤 인형을 남겨놓는 연쇄살인마의 행각은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범인을 쫓는 두 주인공 나이아 툴린과 마르크 헤스의 캐릭터 역시 여러 북유럽 스릴러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툴린과 헤스가 사건에 임하는 태도와 처지는 일반적인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살인수사과의 최연소 여성 팀장 후보지만 정작 살인사건에선 별 흥미를 못 느낀 채 컴퓨터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이버범죄센터로의 이적을 꿈꾸는 툴린은 부디 이 사건이 복잡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귀차니즘’을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또 유로폴에서 징계를 받고 한시적으로 살인수사과에 좌천성 복귀를 지시받은 헤스는 오로지 유로폴로의 복귀만 생각하며 빈민가에 위치한 아파트를 팔아넘기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말도 없고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행색마저 추레한 헤스가 못마땅한 툴린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헤스는 그런 적대감따윈 달관한 듯 초연한 태도만 보입니다.

이렇듯 물과 기름 같던 두 주인공은 동일범의 살인이 연이어 벌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단서 – 1년 전 실종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묻은 밤 인형 – 가 나타나면서 조금씩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갑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하게 눈길을 끄는데 만약 시리즈로 확대된다면 그 어느 콤비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과 1년 전 장관의 딸 크리스티네의 실종사건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개되면서 독자는 두 사건의 접점이 과연 언제, 어디에서 드러날까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두 사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헤스와 자신의 공적이 날아갈까 봐 실종사건 재수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수뇌부가 치열하게 갈등하는 가운데, 툴린은 점점 헤스의 주장에서 설득력을 발견하고 그가 과거 살인수사과의 최고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연쇄살인사건과 나란히 병행되는 또 하나의 시퀀스는 딸 크리스티네를 잃고 휴직했던 장관 로사가 1년 만에 복직하자마자 벌어지는 협박사건입니다. 누군가 로사를 ‘살인범’이라 지칭하며 노골적인 협박을 가해오는데 이로 인해 툴린과 헤스의 수사는 더욱 큰 혼선을 빚게 됩니다.

 

꽤 오래 전 기사지만 “북유럽 스릴러 소설 왜 국내에선 안 뜰까?”(2012년 3월 4일, 경향신문)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과 복잡한 플롯, 그리고 사건은 흉악한데다 등장인물의 과거 상처나 기억이 얽혀드는 탓에 북유럽 스릴러가 한국 독자들에게 안 먹힌다고 분석한 적 있습니다. 분명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더 체스트넛 맨’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어둡기만 한 헤스의 캐릭터와 과거사라든가 끔찍한 범행수법, 또 배경이 10월임에도 작품 내내 장마처럼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풍경 묘사 등 기사 내용과 엇비슷한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영미권 스릴러처럼 친숙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움을 꼽는다면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입니다. 이 역시 북유럽 스릴러의 특징 중 하나인데, ‘더 체스트넛 맨’의 경우 부차적인 시퀀스나 장면들이 분량을 꽤 많이 잡아먹었고,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앞서 읽은 분량들을 조금은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량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더 체스트넛 맨’을 읽다가 조금 지루하다 싶어서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딱 그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조금만 슬림했더라면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을 거란 아쉬움은 책을 덮을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마지막 챕터를 보면 툴린과 헤스가 시리즈 주인공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황인데, 개인적으론 어떻게든 두 사람이 또 한 번 호흡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북유럽 혹은 독일 스릴러에 못잖은 덴마크産 콤비 시리즈의 활약이 더없이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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