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의 섬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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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영국 북부 셰틀랜드 제도에 이사 온 산부인과 의사 토라는

집 앞마당에서 수수께끼에 싸인 여성의 시신을 발견한다.

죽기 얼마 전 출산을 한 흔적이 남아 있고, 심장이 사라진 끔찍한 모습의 시신.

토라는 시신의 이름을 밝혀주기 위해 나름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수수께끼를 풀려는 그녀와 사건을 덮으려는 경찰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는데..

경찰이 숨기려 했던 진실은 섬의 기괴한 역사와 맞물려 토라에게 참혹한 진실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작품의 주 무대인 셰틀랜드 제도는 스코틀랜드 최북단에서도 160km 떨어져있으며,

100여 개의 유무인도가 촘촘히 자리 잡은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15세기까지 노르웨이의 영토였던 탓에 당시의 역사, 전통, 신화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그만큼 독자적인 문화를 고수하며 배타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곳입니다.

 

굳이 이런 장황한 소개를 늘어놓은 이유는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물론 행간을 흐르는 미세한 분위기조차

어딘가 극도로 위험해 보이는 셰틀랜드 제도의 음습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의 섬은 분명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먼 옛날의 신화와 전설의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산 직후 살해된 여인들의 몸에는 다산’, ‘수확’, ‘희생을 의미하는 고대문자가 새겨져있고,

심장이 사라진 참혹한 사체임에도 리넨 천으로 감싸여 소중히 모셔진듯 보이기도 합니다.

 

남편 덩컨 때문에 런던을 떠나 셰틀랜드 제도에 온지 이제 6개월밖에 안 된 토라는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직접 발견한 그 시신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올곧고 거침없는 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인 탓에

출산 직후 살해된 여인의 진실을 미덥지 않아 보이는 경찰에게만 맡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셰틀랜드 제도에서 토라의 유일한 아군은 본토에서 날아온 여자형사 데이나 톨루치입니다.

민간인 의사 토라의 개인적인 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데이나는

토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의 각종 기록을 검색하여 합리적인 단서들을 찾아내자

기꺼이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줍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연이어 위기가 닥칩니다.

누군가 명백한 의도를 갖고 그녀들의 수사를 중지시키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토라는 이제 데이나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합니다.

 

그와 동시에 토라는 피해 여성의 몸에 새겨졌던 트로의 문자가 그저 우연이 아님을,

,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이 사건의 배경에 신화적 요소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우월한 지배자를 자처하며 여성을 억압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남성 중심의 트로신화는

들여다볼수록 토라 앞에 놓인 사건과 유사한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서사 때문에 골치 아픈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대한 상당한 양의 강의를 들어야했는데,

처음엔 좀 낯설다가도 사건과의 접점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나름 흥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에 과연 이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셰틀랜드 제도라는,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공간과 그곳의 독특한 역사를 그리면서도

독자의 위화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인 작가의 필력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스릴러로서의 매력과 음습한 신화의 비린 맛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정도 아쉬운 점이 있어서 별 0.5개가 줄어들었는데,

첫 번째는 내용에 비해 과도한 분량(652p)입니다.

이는 아무래도 셰틀랜드 제도의 역사, 지리, 신화 등에 할애된 분량이 많았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는 인물 소개, 동선 설명 등 모든 면에서 디테일한 묘사를 즐기는 듯한

작가의 고유한 글쓰기 습관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수시로 현실감이 살짝살짝 사라지곤 했던 민간인 토라의 슈퍼우먼 급 능력인데,

요트와 승마 덕분에 후천적으로 얻은 신체적 강점이나 올곧고 직선적인 심성은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 여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때론 민간인 의사라는 캐릭터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과도하게 설정됐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국내에 먼저 소개됐지만 아직 못 읽어본 뱀이 깨어나는 마을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작가는) 영국 고딕 미스터리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뱀이라는 소재와 종교적 상징을 통해 시종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샤론 볼턴이 대략 어떤 스타일의 작가인지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 호감 가는 장르는 아니지만 작가가 워낙 타고난 이야기꾼 같아서

한 편쯤은 더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긴 합니다.

스릴러와 신화를 이만큼 재미있는 픽션으로 섞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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