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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7월
평점 :
‘검은 집’, ‘악의 교전’, ‘말벌’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기시 유스케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강렬한 느낌을 줬던 ‘검은 집’ 이후 그의 팬이 됐지만,
아까운(?) 마음에 아껴 읽다 보니 이제 겨우 네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국내에 12편이나 출간됐고, 소장한 작품도 7~8편인데 너무 인색했던 셈입니다.
‘13번째 인격’은 기시 유스케의 데뷔작입니다.
제목대로 13개의 인격을 지닌 다중인격 여고생 치히로가 등장하고,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을 줄 아는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치히로의 인격을 통합하고 치유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1995년 발생한 고베대지진을 통해 만납니다.
지진의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온 유카리는
모든 봉사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여고생 치히로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여러 인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대지진 와중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는 무척 이질적인 13번째 인격입니다.
유카리는 그 인격에게 ‘이소라’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점도,
또, 그 이름이 일본 괴담 속에 등장하는 끔찍한 원령의 이름이란 점도 석연치 않습니다.
자원봉사기간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뒤 다시 치히로를 찾아온 유카리는
그 사이 치히로 주변에서 의문의 죽음이 잇달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 13번째 인격인 이소라가 연루됐음을 깨닫습니다.
유카리는 이소라를 제거하지 않는 한 끔찍한 비극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사악한 13번째 인격 이소라와 대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임사체험, 유체이탈, 인격 간의 헤게모니 대결 등 강렬한 판타지 요소와 함께
치히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현실적 공포가 가미되면서
굉장히 복잡한 서사가 4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됩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판타지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망각한 채
유카리가 끌고 가는 이야기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의문의 13번째 인격 이소라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유카리의 ‘탐문과 추리’로 이소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에는
머리칼이 쭈뼛거릴 정도의 당혹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도시전설, 원령 괴담, 잔혹 호러, 살인 미스터리를 한꺼번에 읽은 듯한 묵직한 두통은 물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소라의 저주와 공포까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현실적 공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현실감 있게 읽히는 건
100% 유카리의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다는 건 얼핏 ‘특혜’처럼 보이지만,
실은 원하지 않는 엄청난 소음과 환각에 시달리게 되는 저주와도 같은 능력입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 가출을 한 유카리는 먹고 살기 위해 ‘천박한 직업’을 택하지만
그곳에서 의외로 자신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과 선량한 마음씨의 조합이 치히로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결국엔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이소라와의 대결에 헌신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 탓인지, 왜 기시 유스케가 ‘유카리 시리즈’를 이어가지 않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이나 약리학에 대한 엄청난 자료조사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데,
간혹 너무 지나친 나머지 부담스럽게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흔적들 덕분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슬그머니 희미해지면서
독자에게 좀더 리얼한 공포심을 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초 괴담이니 원령이니 하는 컨셉에 우호적이지 않은 독자라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공포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일본 출간 1996년) 이 작품을 2017년에 읽는다고 해도
꽤 높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데뷔작부터 엄청났던 기시 유스케의 내공에 새삼 놀라고 또 놀란 즐거운 책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