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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머니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평점 :
부자들이 즐겨 찾는 테니스 클럽을 방문한 사설탐정 루 아처는
자산가의 아들인 피터 제이미슨이란 청년에게서 의뢰를 받는다.
이웃집에 살며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그의 약혼녀 버지니아가
돌연 인텔리풍의 프랑스인 프란시스 마텔에게 홀려 약혼을 파기한 것이다.
제이미슨은 마텔이 사기꾼이며 심지어 진짜 프랑스인조차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처는 마텔의 행적을 뒤쫓고, 교양 있는 프랑스인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답까지 준비하며
그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 하지만 단서는 쉽사리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구나 수사를 진행할수록 테니스 클럽이 위치한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의 사람들에게서
갖가지 미심쩍은 정황들을 확보한 아처는 수사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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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3대 하드보일드 거장’이라는 로스 맥도널드의 이름도,
또 그가 창조한 명탐정 캐릭터 루 아처도 제겐 거의 생소한 이름입니다.
물론 로스 맥도널드의 활약 시기가 20세기 중반이란 이유도 있지만,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란 걸 감안하면
생소함 자체가 꽤나 당혹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이야기의 출발점, 즉 아처가 피터라는 청년으로부터 받은 의뢰는 무척 심플합니다.
자신의 약혼녀를 빼앗은 마텔이라는 자칭 프랑스 출신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달라는 것인데,
아처가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의 볼륨감은 갑작스러울 정도로 확 커집니다.
마텔을 쫓는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고, 마텔의 동행으로 보이는 수상한 커플이 등장합니다.
마텔을 기억하는 대학교수들은 그를 뛰어난 수재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가 프랑스 인이 아니라 중남미 또는 스페인 계 밀입국자라고 진술합니다.
아처 입장에서 마텔은 그야말로 캐면 캘수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 양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마텔이 7년 전 버지니아의 아버지의 자살 사건은 물론 거대한 도박판의 불법자금,
즉 블랙머니와도 연관돼있다고 확신한 아처는 이제 단순히 마텔의 정체 밝히기를 넘어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에서 벌어졌던 미심쩍은 사건들에까지 관심을 확장시킵니다.
불과 350여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만 놓고 보면 거의 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 작품입니다.
수상한 프랑스 청년의 정체 밝히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처의 광폭 탐문이 진행되면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볼륨을 키웁니다.
그는 몬테비스타 곳곳은 물론 L.A, 라스베거스까지 빛의 속도로 오가며 수사를 펼칩니다.
당연히 그만큼 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역시 방대하면서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룰 것이 없습니다.
아처는 그 모든 정보와 인간관계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추리합니다.
쉬어가는 코너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합니다.
너무 빡빡하고 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명탐정이자 지독한 워커홀릭이라고 할까요?
이런 식의 이야기 구성과 주인공 캐릭터 설정은
속도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동시에 독자의 이해력을 떨어뜨리고 피로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밀한 인구밀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데,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이야기는 과속으로 달리는 바람에
미처 그들의 과거와 현재, 애정과 증오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600페이지가 필요한 인물들에게 350페이지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
캐릭터, 감정, 관계 등 디테일한 부분이 설명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루 아처는 1949년에 출간된 ‘움직이는 표적’을 통해 탄생했다는데,
‘블랙머니’는 1965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는 모두 18편이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하드보일드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려면 그의 첫 데뷔를 읽는 일이 필수인데,
최소한 시리즈의 중반쯤 되는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나다 보니
루 아처의 진짜 매력을 맛봤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유층들만의 테니스 클럽이 자리 잡은 부촌 몬테비스타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이는 송곳 같은 탐문과 핵심만 짚어내는 간결한 말투,
이성과 논리로 중무장한 듯한 금욕적인 태도 등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품 캐릭터 필립 말로를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간간이 목격되긴 하지만
루 아처만의 특별함까지 찾아내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황금가지에서 루 아처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 출간된다면 사건 자체보다 루 아처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초기의 루 아처를 통해 그의 매력을 알게 된 뒤 ‘블랙머니’를 다시 읽는다면
그땐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읽기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