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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조 탤버트는 알코올중독에 조울증 환자인 어머니와 자폐증이 있는 동생으로부터 탈출해
대학으로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대학생이다.
한 인물을 인터뷰해 전기문을 쓰는 과제를 위해 요양원을 찾아간 조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30년 전 이웃집 소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잔인한 살인마, 칼 아이버슨을 만난다.
그는 암 말기로, 세 달 정도 남았을 임종을 앞두고 조에게 ‘마지막 증언’을 하고 싶다고 한다.
조는 칼이 털어놓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이웃집의 매력적인 여대생 라일라와 함께 칼이 묻어두고 살았던 것들을 파헤치러 나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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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형사사건 변호사의 작가 데뷔작이자 각종 시상식을 휩쓴 독특한 이력의 작품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아주 심플합니다.
수업 과제 때문에 우연히 희대의 살인마를 인터뷰하게 된 대학생이
30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의 원죄(冤罪)를 구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선하진 않아도 할리우드에서 아주 좋아할 법한 매력적인 플롯이죠.
조 탤버트는 소시민적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알코올중독에 걸린 어머니와 그녀 곁에서 기생하는 야비하고 폭력적인 애인,
그리고 자폐를 앓고 있는 사랑하는 동생 제러미 등 불행한 가족 관계가 그를 잠식합니다.
술집 기도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빠듯한 경제적 문제도 한몫 거듭니다.
작은 셋방에서 고된 삶을 영위하는 가난한 대학생 조의 유일한 무기라면
기도 생활로 단련된 격투(?) 능력과 타고난 착한 심성 정도랄까요?
다행이라면, 까칠한 연인이자 유능한 파트너인 매력녀 라일라가 조의 곁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소시민적 영웅은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조는 뛰어난 추리능력이 아니라 착한 심성과 소소한 폭력으로 진실을 찾아갑니다.
터무니없는 정의감이 아니라 작은 단서 하나하나를 성실히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확신을 얻고 행동에 옮기면서 위험한 상황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도, 사건 자체도 ‘모범적인 스릴러’의 형태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제목이 가리키듯 ‘그들이 묻어버린 그 무엇’에 있습니다.
조, 라일라, 칼은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오랫동안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아왔습니다.
형태도 다르고, 상처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묻어둔 것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참혹한 기억들입니다.
사랑하던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낚시에 관한 조의 기억,
한때 철없이 망나니처럼 지내던 시절의 라일라가 겪은 끔찍한 사건,
그리고 베트남 참전 당시 칼의 인생을 망가뜨렸던 한 소녀의 죽음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들의 기억과 사건들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 기억과 사건들이 오늘의 그들을 만든 것은 물론,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도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은연중에 각 인물의 무의식을 공유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독자에 따라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라고 반문하는 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진범 찾기’보다 ‘그들이 묻어버린 그 무엇’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힌 탓에
제목 자체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미덕을 정리하자면,
재미를 위해 선택한 독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에 끌려 선택한 독자도 모두 만족할 만한
매력적인 서사와 캐릭터를 겸비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