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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악마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5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평점 :
워낙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중에서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날것 같은 느낌도 꽤 좋아하는 편이라
간혹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일부러 찾아 읽곤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잘 찾게 되지 않았고,
2016년에 출간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검은숲)이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계속 신간에만 매달린 것 같아 작심하고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쓴 책장 속 책들을 둘러보다
몇 년 전 중고로 사둔 란포의 대표작 ‘외딴섬 악마’가 눈에 띄었는데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주말을 맞아 한나절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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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연인이 밀실상태에서 살해되고, 조사를 의뢰한 절친한 탐정까지 살해되자
미노우라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 복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노우라는 동성이면서 자신에게 추파를 보냈던 모로토 미치오를 의심하지만,
그는 연이은 살인사건이 자신과 관련 있음을 순순히 고백하곤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즉, 살해된 연인과 탐정이 지니고 있던 두 권의 문건을 미루어보아
일련의 사건에 외딴섬에 기거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루된 것이 분명하며,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외딴섬으로 찾아가 직접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미노우라와 모로토는 악의로 가득 찬 외딴섬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상상을 초월한 비인간적인 악마와 마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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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악마’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초반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느 고전들보다 훨씬 더 날것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데,
대를 이은 비극적인 유전, 절해고도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사육, 미로와도 같은 수중동굴,
섬 어딘가 감춰져있는 보물찾기, 우연과 운명이 겹쳐진 지고지순한 사랑 등
그 시대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캐릭터, 서사, 코드들이 제대로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고전의 미덕은 여러 가지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점을 첫째로 꼽습니다.
그것이 애끓는 사랑이든 증오로 가득 찬 복수심이든
고전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독자에 따라 그런 대목이 낡고 올드하게 읽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세련되고 쿨한 현대의 캐릭터들에 익숙해져 있다가 간혹 고전 속 인물들을 만나게 되면
‘이러니까 진짜 사람 같네’라는 의외의 느낌을 받곤 해서 개인적으론 무척 반갑게 여겨집니다.
‘외딴섬 악마’ 속의 인물들은 극과 극의 캐릭터로 그려지긴 하지만,
선한 인물도, 악한 인물도 모두 꾸미지 않은 돌직구처럼 묵직하고 일관된 욕망을 발산합니다.
사건은 단순하고, 해법 역시 긴장감은 넘쳐도 딱히 독자의 뒤통수를 칠 만한 대목은 없어서
복잡다단한 요즘의 작품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무척 싱겁게 읽힐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아날로그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공포의 서사는
사건과 해법의 단순함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불어, 약간 신파의 냄새마저 나는 주인공의 멜로도
낯설고 어색하기보다는 어딘가 애틋함이 느껴지는 ‘그 시대의 사랑법’으로 읽힙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세계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어서
‘외딴섬 악마’가 그의 이력 가운데 시기적으로나 성향 면에서 어디쯤 위치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원시성, 기이함, 공포 등의 코드가 잘 배합된 작품이 있다면 꼭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인 에도가와 란포와의 즐겁고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