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마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박춘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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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에게 한 실업가가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곧 살해당할 것 같다며, 자신이 죽은 후의 처리를 햐쿠타니에게 의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제로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세 번째 부인인 아야코가 지목된다.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를 독살했다고 자백한 아야코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선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의 행방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계재판’, ‘문신살인사건’, ‘대낮의 사각에 이은 다카기 아키미쓰와의 네 번째 만남입니다.

패전 후부터 1960년대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작품마다 묘한 매력들이 있어서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찾아 읽게 되는 작가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파계재판에 이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라서 더욱 관심이 갔는데,

넉넉한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장편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파계재판과 유사합니다.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소재로 한 점,

법정에 선 피고인의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 스토리라는 점,

그리고, 변호에 그치지 않고 진범을 공개 지목하여 법정 안을 충격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구조의 이야기에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유력한 범인으로 추정되는 피고인입니다.

단서가 됐든 정황이 됐든 목격담이 됐든 그 피고인은 명백한 진범으로 여겨져야 하고,

그 추정이 단단할수록 원죄를 벗기려는 주인공 변호사의 이야기가 쫀쫀해지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마녀의 피고인 아야코는 그런 면에서 꽤나 단단한 추정 속에 갇힌 인물입니다.

피살자와 함께 있는 현장에서 발견됐고, 독살의 증거인 청산가리가 그녀 방에서 발견됐으며,

피살자의 가족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동기가 분명한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물론

본인 스스로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애초 생전의 피살자로부터 사후 처리 의뢰를 받은 주인공 햐쿠타니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을 변호한다는 점입니다.

, 햐쿠타니는 피살자와 함께 있던 피고인을 제일 먼저 목격한데다

그녀가 사인을 병사로 은폐하려 한 것까지 지켜본 탓에

누구보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햐쿠타니는 어딘가 기분 나쁜 분위기를 발산하는 피살자 가족들의 태도가 수상했고,

무엇보다, 피고인에 대한 탐문을 통해 원죄의 가능성을 확인하곤 승산 없는 변호를 결심합니다.

 

1963년의 작품이라 그런지 파계재판’(1961)과 마찬가지로

단선적이고 심플하고, 정직한 돌직구 같은 법정 미스터리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햐쿠타니의 노력은 집요하고 끈질긴 탐문이 거의 전부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예기치 못한 수확덕분에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물론

진범의 정체와 살해 동기까지 폭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문에 법정 장면과 탐문 장면이 대부분인 이야기는 단조롭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대신 작가는 피살자와 피고인, 그리고 그들의 수상한 가족들 쪽에 진한 양념을 뿌려둡니다.

, 두 명의 전처와 그 소생들, 죽은 형의 딸, 예비사위로 점찍은 부하직원 등

적대적 감정들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가계도를 설정함으로써 법정물의 단조로움을 극복합니다.

악의에 찬 면면들을 보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 같고,

독살이란 방법 때문에 누구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물적 단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단서가 더 중요해진 탓에

햐쿠타니의 조사는 좀처럼 쉽게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 햐쿠타니 만큼 눈길을 끄는 두 명의 캐릭터가 있는데,

한 명은 특유의 을 발휘하여 햐쿠타니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는 그의 아내 아키코이고,

또 한 명은, ‘파계재판에 이어 햐쿠타니와 재대결하게 된 맹렬 검사 아마노입니다.

햐쿠타니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대목에서 비범한 직감을 발휘하는 아키코는

매력적인 연상녀에 신비함까지 풍기는 캐릭터라 무척 기대가 됐고,

아마노 검사는 파계재판에서 햐쿠타니에게 워낙 큰 역전패(?)를 당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번에는 어떤 승부를 펼칠지 역시 큰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짧아서 그랬겠지만, 두 사람 모두 소소한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아마노 검사는 단순 조연 정도로만 그려져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후반에 실린 상세한 작가 소개를 보니 다카기 아키미쓰의 왕성한 이력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만 해도 7작품이나 되고,

가장 매력적인 작품인 문신살인사건이 속한 가미즈 교스케시리즈도 18작품이나 됩니다.

다음에 어떤 작품이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미스터리 구조와 올드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좋아서 그런지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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