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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ㅣ 엔시 씨와 나 시리즈 3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하늘을 나는 말’, ‘밤의 매미’에 이은 ‘엔시 씨와 나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 불렸다는 이 시리즈에는 ‘엔시 씨’와 ‘나’라는
좀 특별한 캐릭터를 지닌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나’는 스무살 문학부 여대생입니다.
책을 좋아하고, 고문학과 전통예능에 조예가 깊은 그녀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 가운데
라쿠고(落語)라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 예술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채나 수건 같은 소도구와 함께 목소리, 추임새, 몸짓만으로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연기하는 예술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좋아하는 라쿠고의 대가 슌오테 엔시 씨를 알게 된 ‘나’는
이후 일상에서 기이하거나 미스터리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를 찾아 상담을 하곤 합니다.
앞선 두 편의 작품이 모두 단편집인데 반해 ‘가을꽃’은 이 시리즈의 첫 장편입니다.
장르 자체가 ‘일상 미스터리’라 어쩌면 단편이 더 어울리는 시리즈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다루다 보니 단편에서는 분량이나 깊이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편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가을꽃’은 이 시리즈에서는 처음으로 ‘죽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나’의 후배인 여고생 쓰다가 학교 옥상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
그로 인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쓰다의 절친이던 이즈미가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옥상은 밀실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범인을 특정하기 곤란한 상황이고,
패닉상태에 빠진 이즈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의문의 편지들이 날아듭니다.
그 중 하나는 “쓰다 마리코는 살해당했다.”라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사건 당일 쓰다를 목격했던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수집된 단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습니다.
때마침 엔시 씨가 라쿠고 공연 때문에 연락을 해오자 ‘나’는 그의 도움을 얻기로 합니다.
‘가을꽃’은 장편이지만 287페이지의 짧은 분량입니다.
여고생 쓰다의 죽음의 미스터리가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역시 그에 맞먹는 비중으로 주인공 ‘나’의 성장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미스터리와 성장 스토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시킵니다.
동화에서 고전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독서, 또래 친구들과의 수다 또는 상담,
태풍과 함께 등퇴장하는 여름과 가을의 분위기, 계절의 변화에 맞춰 피고 지는 꽃 등
주인공 ‘나’의 삶과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매개체들이 성장의 밑거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매개체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로 하여금 쓰다의 죽음을 연상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때론 책임감의 형태로, 때론 진실 찾기라는 순수한 욕망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나’와 엔시 씨가 찾아낸 진실 속에는
“죄 없이 살아온 평범한 사람에게도 부조리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것까지도 우리의 일상.” (옮긴이의 말 中)이라는,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실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당혹스러운 주제가 진하게 녹아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 부조리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터넷 사회 뉴스만 검색해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또,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쓰다와 이즈미가 마주한 부조리한 사건은 화가 날 정도로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리 그런 것까지 모두 우리의 일상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나’의 방대한 독서량에 놀랄 것이고,
연이어 인용되는 다양한 동화, 고전, 소설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꽤 많은 분량의 문장들을 보면서
이 작품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출연 분량이 얼마 안 되는 엔시 씨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히 여길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의문과 놀람들은 전작을 읽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입니다.
만일 ‘가을꽃’이 매력적으로 읽혔다면, 또는 ‘나’와 엔시 씨의 전사(前史)가 궁금하다면
앞선 두 편의 단편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의 첫 장편을 읽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지만,
미스터리에 좀더 방점이 찍히지 않은 것은 역시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작가가 ‘나’의 이야기를 좀더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세 편의 시리즈를 모두 읽고 보니 이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고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그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