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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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82년생일까?’, ‘왜 주인공 이름이 저토록 특색 없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채 1/3도 읽기 전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관한 한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

이보다 더 적절한 주인공의 캐릭터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2015년 현재 우리 나이로 34살인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친정엄마가 됐다가, 친했던 대학선배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그녀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김지영이 진술한 자신의 일생에 관한 짧은 리포트로 이어집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겪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의 시간들,

그녀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 학창시절을 거치는 동안 겪은 크고 작은 불합리한 일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간 뒤, 결혼한 뒤, 아이를 낳은 뒤 겪은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나열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됐다면

아마 대부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를, 아니 절대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습니다.

 

김지영이 겪은 고난과 불합리와 부조리는 사실 폭력과 동의어입니다.

가해자는 가족, 친구, 선생, 직장동료, 낯선 타인 등 그녀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남자가 가해자였던 것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동지들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 가운데 명백한 적대감을 갖고 폭력을 휘둘렀던 건 극히 일부라는 점입니다.

대다수는 그게 당연한 거니까’, 또는 상식이니까라는 이유로 김지영을 아프게 했습니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것 같아서 태워준 거야.”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배불러까지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고백하자면, 이제 나이가 먹어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맥락 없는 것들이란 걸 깨닫게 됐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저 역시 숱한 ‘82년생 김지영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휘둘렀고 깊은 상처를 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이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거고, 그러니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저 부끄럽고 창피해질 따름입니다.

 

김지영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큰 목소리를 몇 번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씹다 버린 껌으로, 재수 없는 첫 손님으로, 대책 없는 임산부로 여기는 가해자들에게

큰 목소리로 화내려다 말고, 따지려다 참고, 저항하려다 미루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34살이 된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말을 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깊고, 두껍고, 끝없는 분노를 느끼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82년생 김지영들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런 삶을 강요받고, 강요받을 거란 사실에 지독한 씁쓸함까지 맛보게 됩니다.

 

아마도 가해자들은 이 소설을 지긋지긋한 페미니즘이라고 편리하게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가해자인지도 모를뿐더러,

좀 심하게 말하면, 김지영의 상처에 대해 조금도 공감 못하는 사이코패스인지도 모릅니다.

의 여자들에게 제멋대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성희롱을 자행하곤

밤늦게 귀가하는 딸을 에스코트하러 간다며 술자리를 뜨는 작품 속 대기업 부장처럼 말이죠.

 

이 작품을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작정 싸우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어떤 선택에서도 를 포기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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