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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고통 ㅣ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하숙집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부를 만큼 예의 바르고 조용하며
회사에서는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는 젊은 과학자 데이비드 켈시.
그는 2년 전 고향에서 애나벨을 보고 첫눈에 반한 뒤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지만,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큰 충격에 빠진다.
애나벨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데이비드는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둘만을 위한 집을 마련하곤,
주말마다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을 상상하며 보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애나벨에게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애나벨과 결혼한 사내가 찾아오면서 데이비드의 비극은 시작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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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름과 그녀의 대표작인 ‘리플리 시리즈’는 여러 번 들어 익숙했지만,
작품으로 만나는 건 국내 초역 출간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처음입니다.
1960년에 출간된 심리서스펜스라는 것 외엔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일찌감치 밝혀지는 주인공 데이비드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법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제목에 담긴 반어법의 의미가 뚜렷이 각인됐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가명으로 집을 사고
주말이면 그곳에서 그녀와 클래식과 와인을 즐기는 상상을 하며 절정감을 느끼는 데이비드는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지독하게 일그러진 스토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이라는 아날로그적인 배경은 어딘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 합니다.
불편한 전화통화, 편지로 오가는 고백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등
스마트폰과 각종 디지털 문명이 삭제해버린 ‘관계와 소통의 문제’ 덕분에
데이비드의 사랑은 일견 섬뜩하면서도 애틋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듭니다.
더구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인격체로, 또, 능력 있는 과학자로 인정받는 그가
한편으론 두 개의 집과 두 개의 인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현대의 그 어떤 편집증적이거나 집착적인 사랑에 빠진 캐릭터도
이토록 매력적(?)이진 않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작가는 이런 데이비드의 심리를 때론 돌직구처럼 과격하고 거칠게,
때론 시적인 섬세함과 (그의 직업대로) 과학적인 정교함으로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그 덕분에 3인칭 시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데이비드에게 꽤나 깊이 이입하게 됩니다.
그의 일그러진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게 될 때도 있고,
동시에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몸과 마음에서 무한 증식하는 그의 집착이
어떤 식으로 그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으며 붕괴시키는지 잔인할 정도로 천천히 묘사합니다.
애나벨을 향한 그의 사랑은 끝내 살인이라는 참극을 불러오고,
그때부터 데이비드와 뉴마이스터라는 두 개의 인격이 각각의 역할놀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놀이의 실체를 궁금히 여기는 주변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서사까지 함께 전개시킵니다.
사실 이 미스터리 서사가 현대 독자의 눈에는 가장 거슬리는 대목인데,
번역하신 김미정 님도 후기에서 지적했듯
‘느슨하게 수사한 후 대충 넘어가는’ 경찰 때문에 몰입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수사나 네트워크로 공유된 범죄자정보 같은 게 요원했던 1950년대 후반이긴 하지만
눈앞의 진실을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경찰의 태도가 내내 목에 가시처럼 느껴진 건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아무래도 심리 서스펜스라는 장르의 특성 상
빠른 전개나 사건 위주의 서사가 아니라 느리고 집요한 심리 묘사가 지배적인 작품이다 보니
때론 장황함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점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게 그녀만의 개성을 부여한 매력 포인트겠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게 만드는 지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센 캐릭터들과 독한 이야기들 덕분에 생긴 내성 때문일 수도 있고,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가치관 또는 도덕관의 결과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동안 먹먹한 감정에 휩싸였다’는 번역가 김미정 님과는 달리
아무래도 그의 ‘달콤한 고통’에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데이비드를 미화하거나 구원하거나 징벌할 생각 없이
독자에게 ‘생각을 위한 먹잇감’으로 툭 던져놓은 듯한 작가의 스탠스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독자들의 평가와 호불호가 무척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