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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평점 :
2016년 베스트로 꼽았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피터 스완슨이 작가로서 이름을 처음 알린 데뷔작입니다.
전작처럼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끌었는데, 원제는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번역 제목이 무척 잘 지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18살, 대학 신입생 시절의 조지 포스와 ‘그녀’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40대를 바라보는 중년에 이른 조지 포스와 ‘그녀’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입니다.
‘그녀’에겐 오드리 벡, 리아나 덱터, 제인 번이라는 3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3개의 이름은 소설 속 이야기만 놓고 봤을 때 얘기고,
소설 밖의 삶에서는 도대체 몇 개의 이름을 더 가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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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신입생 시절 짧지만 불같은 사랑을 나눴던 리아나와 20년 만에 재회합니다.
무력한 중년의 삶에 지쳐가던 조지에게 리아나와의 재회는 가슴 떨리는 절정감을 전해줍니다.
그는 20년 전 경찰에게 쫓기다가 홀연히 사라진 리아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든 그녀와 우연히라도 마주치기를 고대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만난 그녀가 암울했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꽤나 곤혹스러운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훔쳤던 거부(巨富)의 돈을 돌려주고 싶은데 너무 무서우니 대신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조지는 불온한 기운을 느꼈지만 결국 리아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녀와 다시 한 번 불꽃같은 사랑을 만들어나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조지의 설렘 가득한 기대는 얼마 못가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리아나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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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이란 제목을 굳이 풀어서 써보면,
‘사랑을 앞세워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 정도가 될까요?
여주인공 리아나 또는 오드리 또는 제인은 액면대로만 보면 타고난 악녀이자
아낌없이, 또 끝없이 상대를 빼앗고 이용하는 악당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입니다.
반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주인공 조지는 가련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독자는 이런 일방적 감정 외에 또 다른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리아나라면 아낌없이 빼앗아서라도 저주받은 숙명에서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
‘내가 조지라도 아낌없이 빼앗길망정 결코 리아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작가의 전작인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을 때도 느낄 수 있었는데,
분명 성격은 다르지만 리아나는 어딘가 ‘죽여 마땅한~’의 여주인공 릴리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릴리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기꺼이 죽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켰다면,
리아나는 명백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잔혹하게 살해합니다.
릴리가 ‘제발 붙잡히지 말았으면’이라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선사했다면,
리아나는 ‘잡히긴 잡혀야 되는데, 한편으론 안 잡혔으면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일으킵니다.
아무튼...
늘 이번까지만, 하면서도 조지는 내내 리아나의 정교하고 치밀한 계획에 끌려 다닙니다.
심지어, 리아나를 쫓는 미지의 험상궂은 인물에게 협박당하고 폭행당하는 것은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리아나 때문에
경찰에게 의심까지 받게 되는 등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빠집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종잡을 수 없는 리아나로 인해 지독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조지는 끝까지 리아나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지에게 주어진 엔딩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사실, 조지 입장에서 보자면 이 작품의 제목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돼야겠죠.
18살 신입생 시절에도 그랬고, 마흔이 다 된 지금도 조지는 한결 같습니다.
리아나가 자기 앞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폭력이 난무하는데도 말입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삐딱한 반응이 당연한 일이지만,
작가는 그런 조지를 ‘충분히 이해가 되는 캐릭터’로 잘 포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악녀와 순정남’이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를 바라게 만듭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인데, 그 이해하기 힘든 대목 때문에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제대로 된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 묵직한 장편이 아니라서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척 즐거운 책읽기였습니다.
중편에 가까운 분량이라 금세 읽히기도 하고,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피터 스완슨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지의 뒷이야기든, 릴리의 뒷이야기든, 새 인물의 새 이야기든
얼른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 출간되기를 벌써부터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