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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평점 :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은 일반적인 스릴러 범주에 우겨넣기에는 그 색깔이 너무 독특합니다.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괴물의 이야기를 다룬 ‘속삭이는 자’도 그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후속작 ‘이름 없는 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스탠드얼론이라 할 수 있는 ‘안개 속 소녀’는 비교적 대중적인 코드로 이뤄진 작품임에도
역시나 그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진하게 투영된 탓에
일반적인 스릴러라 부르기 곤란한, 그래서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기 쉬운 작품이 돼버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전작들에 비해 심플합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마을 아베쇼에서 10대 소녀 애나 루 실종사건이 벌어집니다.
언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스타 형사 포겔이 아베쇼에 도착하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금세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함으로써 전국을 들썩이게 만듭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로리스 마티니는 평범한 학교 교사였지만,
포겔의 집요한 공세와 언론의 마녀사냥 식 보도에 광분한 대중들에 의해
순식간에 잔혹한 괴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화려한 쇼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포겔은 당당히 아베쇼를 떠나려 했지만,
그에게 날아든 한 통의 전화는 그가 공들여 완성했던 쇼를 산산이 부숴놓습니다.
전작들에 등장했던 캐릭터들과 달리 ‘안개 속 소녀’의 주요인물들은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언론을 통해 사건과 수사를 쇼로 만들곤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하는 포겔,
포겔이 던져준 미끼를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하고 돈을 버는 언론 매체들,
진실 따윈 관심도 없이 오로지 분위기에 휩쓸려 광분하는 마을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교사에서 사악한 괴물로 전락하는 무고한 용의자 등
도나토 카리시가 창조한 캐릭터라고 보기엔 너무 대중적이고 쉬워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이야기 역시 복잡다단했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거의 예상된 경로로만 흘러가서,
왠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뭐랄까, 탐욕투성이 형사와 광기에 사로잡힌 미디어와 대중을 고발하는 돌직구 같은 고발극?
괴물잡기에만 몰두한 사법제도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소시민의 비극을 그린 사회물?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나토 카리시라면 분명 그 이면에 뭔가 감춰둔 것이 분명하기에,
기대와 의심(?) 속에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눈썰미 빠른 독자라면 대략의 엔딩을 예상할 수 있고,
관심은 ‘과연 작가가 어떤 방법으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장식할 것인가?’에 몰리게 됩니다.
아마 이 지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게 될 것 같은데,
막판 반전을 매력적이라고 여긴 독자들은 ‘역시 도나토 카리시!’라며 찬사를 보낼 것이고,
그 대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지라고 받아들인 독자들은 허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반전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게 ‘설계’됐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작가가 뿌려놓은 소소한 단서들이 일궈낸 제대로 된 반전은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안개 속 소녀’의 반전은 ‘반전 자체를 위한 끼워 맞추기 식 변명’이란 생각이 듭니다.
도나토 카리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4페이지를 통해 또 한 번의 반전을 제공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마저도 사족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엔딩과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마저 무너졌다고 할까요?
중앙에서 파견된 일개 형사에 불과하면서도 언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사를 이끄는 포겔의 캐릭터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증거도, 단서도 없이 단지 정황만으로 마녀사냥 하듯 용의자를 특정하고 몰락시키는 장면은
오히려 그를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고는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속삭이는 자’와 ‘이름 없는 자’의 경우 쉽게 납득되지 않는 모호함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100%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라
전부 이해하거나 공감하진 못해도 그 나름의 독특함과 매력을 지녔다고 평가했었는데,
‘안개 속 소녀’는 잘 읽히는 맛깔난 문장 외에는
도나토 카리시만의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매번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다음에 또 읽어야 하나?’를 고민하곤 했는데,
‘안개 속 소녀’는 그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중에 신작이 나오면 결국엔 고민 끝에 또 읽게 될 것 같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