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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장 ㅣ 행복한 탐정 시리즈 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5월
평점 :
이른바 ‘행복한 탐정’이라 불리는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세 번째 작품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이후 거의 2년 만인데,
시리즈 1~2편(‘누군가’, ‘이름 없는 독’)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신작과 만나게 됐습니다.
대기업 이마다 콘체른 회장의 사위이자 사내 홍보지 편집자였던 스기무라는
(전작에서) 자신이 인질로 연루됐던 버스 납치사건과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재벌가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상실하면서 직장과 가정을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전작은 스기무라가 본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마무리됐는데,
‘희망장’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탐정의 길을 걷게 된 스기무라의 사연과 함께
그가 의뢰받은 몇몇 사건들의 해결과정과 그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은 사실 ‘행복한 탐정’이라는 시리즈 타이틀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입니다.
(앞선 전작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역시 말할 것도 없었지요.)
스기무라가 탐문과 추리를 통해 빚어낸 성과 자체는 명쾌하고 시원하지만,
그는 행복하다기보다 소소한 탐정생활에 만족하는 소시민처럼 보일뿐이고,
진실을 드러낸 이야기는 해피엔딩보다는 씁쓸하고 착잡하게 마무리되곤 합니다.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악당이라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피해자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범인의 악의로 인해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간직하게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악의를 품을 수 있다!’는 편집 후기의 제목은
아마도 그런 맥락을 감안해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범인이 누구냐?’ 또는 ‘사회가 이런 비극을 낳았다’라는 서사 대신
소시민에 가까운 사립탐정의 눈에 비친 개인의 비극과 상처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잔인한 소시오패스나 연쇄살인범 이야기는 재미있게는 읽혀도 ‘딴 세상 일’일 뿐이지만,
평범한 개인이 저지른 끔직한 사건의 뒷이야기는 ‘내 주변의 일’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희망장’에 수록된 네 작품은 뒤끝이 꽤 길게 남는 편에 속합니다.
특히 스기무라의 탐정으로서의 활약 자체보다
의뢰인을 포함하여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적잖은 무게를 실은 탓에
자꾸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울 것.”이란 인상을 받게 되는데,
미야베 미유키 소설에 익숙한 저로서도 이런 인상은 그리 편하게만 다가오진 않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상 때문에 그녀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건은 작지만 고뇌는 깊다.”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은
제가 받은 인상을 ‘한 줄 카피’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기무라의 낡은 탐정사무소가 위치한 도쿄의 오가미 초 풍경이라든가
집 주인을 비롯한 이웃들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포근한 일상미스터리가 먼저 떠오릅니다.
실제로 그런 느낌의 수록작도 있지만
어쨌든 ‘희망장’은 그 어느 사회파 미스터리보다 더 묵직하고 은근한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 또 범죄가 남기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목적의식 때문인지 간혹 미스터리로서의 허술함이 눈에 띄는 대목도 있고,
단서나 증언이나 목격담 등에서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아쉬움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시리즈의 숙명인지 작가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속작에서는 이런 아쉬움들이 조금은 덜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3.11 동일본 대지진이 언급된 ‘도플갱어’가 제일 기억에 남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수록작에 비해 미스터리 서사가 촘촘하게 설정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남자의 30년이 넘는 자책감과 그의 주변에서 반복되는 비극을 다룬 ‘희망장’도 좋았고,
스기무라가 탐정사무소를 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프리퀄로 그린 ‘모래 남자’도 괜찮았습니다.
독자에 따라 인상 깊은 수록작이 다 다르겠지만,
평범해서 오히려 보기 드문 사립탐정 스기무라 사부로의 활약은 매 작품마다 매력적입니다.
소위 초대박 작품은 아니지만,
스기무라 사부로의 캐릭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