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말 엔시 씨와 나 시리즈 1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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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상 미스터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나 감동 또는 운치 있는 작품이라고 입소문이 돌면

신인이든 기성이든 가리지 않고 일부러라도 찾아 읽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1989년 출간 이래 일본에서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 불린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하늘을 나는 말은 꽤나 호기심을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화자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인 19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고풍스런 여대생입니다.

벤츠 타고 드라이브나 할까?”라는 프로포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괜찮은 고서점이 있는데..”라는 말엔 귀가 종긋합니다.

적은 용돈을 쪼개서라도 오페라나 가부키 등 유명한 공연은 놓치지 않고,

지하철에서 읽는 책은 죄다 동서양의 고전이며,

심지어 여행 갈 때 지니고 가는 책도 헤이안 시대의 속요집입니다.

 

해박한 고문학 지식 덕분에 는 라쿠고가(落語家)로 유명한 엔시 씨와 만나게 됩니다.

(라쿠고(落語)는 좀 생경한 일본 예능인데, 본문 시작 전의 일러두기를 보면,

근세기에 생겨나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 예술.

부채나 수건 같은 소도구와 함께 목소리, 추임새, 몸짓만으로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연기한다.‘라고 돼있습니다.)

엔시 씨는 특정 유파의 5대 째 라쿠고가로, 어린 딸이 있는 마흔 즈음의 남자입니다.

안 그래도 라쿠고를 사랑하고 엔시 씨의 공연을 즐겨 찾던 로서는

우연히 찾아온 그와의 만남 덕분에 19살의 여름부터 겨울을 뜻깊게 보내게 됩니다.

 

엔시 씨는 라쿠고에 능한 예능인일뿐 아니라, 굳이 비유하자면 끝내주는 일상 탐정입니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견딜 수 없어 하는 는 엔시 씨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 뒤로

주변에서 소소한 사건 또는 의문들이 벌어질 때마나 그에게 묻는 버릇이 생겼고

엔시 씨는 빠르든 늦든 어김없이 사건과 의문을 풀어내서 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겠지만 엔시 씨를 사심(?)없는 중년 유부남으로 설정함으로써

와 엔시 씨 사이에 남녀의 케미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스승 같고, 때로는 아버지 같고, 때로는 친구나 연인 같은 두 사람은

오히려 남녀의 케미가 없기에 더 담백하고 따뜻하게 읽히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엔시 씨와 나시리즈가 6편이 나왔다고 하니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직은 모를 일입니다만..^^

 

하늘을 나는 말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일상 미스터리인 만큼 살인 같은 무겁고 잔인한 사건은 전혀 없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범죄 수준의 사건 또는 일상적인 의문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숙부집에만 가면 악몽을 꾸곤 했던 노교수의 오랜 궁금증을 풀어준다든가,

카페 구석에 몰려 앉아 홍차에 무려 7~8스푼의 설탕을 넣는 여성의 비밀을 캔다든가,

유치원 앞에 놓여있던 장난감 목마가 하룻밤 사이에만 실종됐던 이유를 추론한다든가

그야말로 순도 100%의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됩니다.

 

솔직하게 평하자면,

와 엔시 씨의 캐릭터에 매혹된 독자라도

5편에 담긴 일상 미스터리는 조금은 만족도가 떨어질 여지가 많습니다.

이 작품이 1989년에 출간됐고, 그 영향으로 많은 일상 미스터리가 출간됐다고 하지만,

요즘 들어 꽤 수준 높은 일상 미스터리(물론 진정한 의미의 일상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사건의 수위도 세고, 미스터리의 성격이 강한 내용들입니다만)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고전 또는 정통 일상에 가까운 하늘을 나는 말의 다섯 수록작들은

상대적으로 밋밋하고 심심하게 읽힙니다.

간혹 비약이 심한 엔시 씨의 추리도 눈에 거슬릴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론 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그래서 엔시 씨에게 의뢰하게 되는 사건 자체가

장르물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의 성장소설에 어울리는 수준과 규모에 머물고 있어서

이 작품을 미스터리로 접근한 독자들에겐 아쉬움이 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엔시 씨와 나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밤의 매미

1991년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고, 곧 국내에도 출간될 예정이지만,

아직까지는 계속 이어서 읽을 것인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독한 쪽의 취향을 가진 제가 또다시 착한 이야기를 택할지 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사건 같은 사건도 있으면 좋겠고, 너무 신비한 엔시 씨도 좀 현실적이면 좋겠고,

반전이든 감동이든 나름의 비장의 무기도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욕심입니다.

물론 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걸 보면 첫 작품에 비해 미스터리가 강조된 것 같기도 하고,

, 두 사람의 케미라든가 20살이 된 의 성장도 무척 궁금해서 이래저래 고민 중입니다.

일단 제가 좋아하는 독하고 센 이야기를 1~2권 정도 읽은 뒤에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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