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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ㅣ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평점 :
스웨덴 보렌스홀트 갑문 수로에서 성폭행과 교살의 흔적이 남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지역경찰과 함께 수사에 나선 국가범죄수사국 형사 마르틴 베크는 우여곡절 끝에 사건 발생 3개월 만에 시신의 신원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중간에 승선한 갑판 승객까지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다국적 승객과 선원들을 조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베크는 미량의 단서조차 포기하지 않은 끝에 결국 용의자를 특정합니다. 다만, 범죄사실 입증을 위해 위험하지만 유일한 작전을 펼쳐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 ‘경찰소설의 모범’이라 불리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스웨덴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1965년부터 10년에 걸쳐 공동집필한 작품으로, ‘로재나’는 그 시리즈의 포문을 연 첫 작품입니다. 이전에 한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작품은 시리즈 대표작인 ‘웃는 경관’(동서문화, 2003년)인데, 늘 읽어봐야지 하다가도 오역과 오타에 관한 평이 많아서 계속 미뤄두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즈 1~2편인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가 새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곤 드디어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 형사 마르틴 베크와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다 읽은 후에 서문과 후기, 출판사 소개글 등을 읽다 보니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에드 맥베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작가 본인들의 고백인지 평론가들의 추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가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됐으니 10년 정도면 북유럽에도 그 여파가 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대한 한 줄 평을 해본다면 아마 “차갑고 우울한 ‘87분서 시리즈’”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사건은 여름에 벌어지지만 마르틴 베크의 수사는 주로 으슬으슬한 가을과 겨울에 이뤄집니다. 그래서인지 비와 눈이 내리는 스웨덴 곳곳의 이른 아침과 밤풍경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런 분위기를 더욱 차갑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마르틴 베크의 캐릭터입니다. 딱히 열정적이라 할 수는 없어도 경찰로서의 사명감만큼은 확실한 인물이지만, 해체 직전의 가족, 몸에 밴 듯한 우울함, 툭하면 거북해지는 속, 그리고 일 외에는 특별히 관심 갖는 것이 없어 보이는 건조함 등 때문에 어지간한 하드보일드 캐릭터보다 더 딱딱하고 무채색 같은 인물로 보였습니다. ‘87분서 시리즈’의 스티브 카렐라와는 무척 대조되는 캐릭터인 셈입니다. 물론 그의 주변에는 유능하고 유쾌한 동료들이 포진돼있습니다. ‘87분서 시리즈’의 마이어를 닮은 콜베리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 멜란데르가 그들인데, 그들 덕분에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이야기의 톤이 어느 정도 생기를 갖게 됩니다.
마르틴 베크의 캐릭터는 후속 작품을 통해 좀더 지켜봐야 그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소설의 핵심인 ‘사건과 수사’ 부분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입니다. 헨닝 망켈의 서문과 평론가의 해설, 또 출판사의 소개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로재나’는 경찰의 근본적인 덕목, 즉 참을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 느리고 짜증스러운 현실 수사에서 유발되는 긴장감을 사용해 철저한 사실주의를 구현했다.
이 두 문장은 분명 ‘로재나’의 미덕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제겐 ‘로재나’가 안고 있는 아쉬움을 그대로 드러낸 문장으로 읽혔습니다. ‘참을성’과 ‘철저한 사실주의’를 위해 전개는 한없이 느려졌고 디테일은 과도하게 묘사됐는데, 그 때문인지 마치 6개월에 걸친 수사일지를 통째로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참을성’은 덕목이 아니라 무기력으로 읽혔고, ‘철저한 사실주의’는 전혀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무겁고 우울한 주인공의 캐릭터마저 더해지다 보니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셜록 홈스 식 수수께끼 풀이가 만연하던 1960년대 스웨덴에서 최초로 현실적인 경찰수사를 다룬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신선한 충격을 준 건 사실이겠지만, 2017년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87분서 시리즈’ 역시 비슷한 아쉬운 점들을 갖곤 있지만 그래도 긴장감과 속도감, 다양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탄력 있게 만들어주고 있기에 호평 속에 여러 권의 시리즈가 연이어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가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해 스웨덴 범죄소설작가 아카데미에서 ‘마르틴 베크 상’을 제정하여 매년 훌륭한 범죄소설에 시상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북유럽 미스터리의 한 획을 그은 시리즈임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로재나’를 읽고 나니 (오역과 오타가 있더라도) 시리즈 대표작으로 꼽히는 ‘웃는 경관’을 먼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두 커플작가의 필력과 주인공 마르틴 베크의 매력을 재발견한다면 다시 돌아와 시리즈 2편인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를 읽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