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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놓지 마
미셸 뷔시 지음, 김도연 옮김 / 달콤한책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미셸 뷔시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검은 수련’도 좋았지만 ‘그림자 소녀’에서 그의 진가를 만끽한 바 있어,
이 작품 역시 묵직한 서사와 사건 이면의 깊은 울림을 기대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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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의 매력적인 휴양지인 프랑스嶺 레위니옹 섬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던 마샬 벨리옹은
미모의 아내 리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지역헌병대에 신고합니다.
지역헌병대장인 아자 푸르비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수사한 끝에
신고자이자 남편인 마샬을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지만,
마샬은 무슨 까닭에선지 체포 직전 6살 된 딸 조세파와 함께 호텔에서 사라집니다.
순순히 수사에 응하던 마샬이 갑자기 도주하자 아자 푸르비는 의문에 휩싸이지만,
그의 도주 경로에서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자 의문은 뒤로 미루고 체포에 주력하기로 합니다.
특수부대까지 동원된 추격전이 벌어지지만 섬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마샬은
헌병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조세파와 함께 섬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전력을 다 합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섬 반대편에서 마샬은 참혹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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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셸 뷔시의 전작에서 느꼈던 매력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외양 – 사건의 무대라든가 다양한 인종의 캐릭터 등 – 은 제법 화려하게 꾸며졌지만,
알맹이, 즉 스토리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고,
미스터리 자체도 구성, 개연성, 반전 모두 기대만큼 강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화려한 포장과 말초적인 사건만으로 조합된 작품이랄까요?
살인사건의 주 무대인 레위니옹 섬은 꽤나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아프리카-아시아계가 뒤섞여있는 인종과 종교의 전시장,
2년마다 용암이 터져 나오는 위험한 화산섬이자 산호초로 둘러싸인 휘황찬란한 휴양지,
외지인들의 화려한 바캉스와 대비되는 원주민들의 가난과 폭력과 마약에 찌든 일상...
미셸 뷔시는 레위니옹 섬의 이런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당연히 독자로서는 리안의 실종사건과 연이은 살인사건이
이러한 레위니옹 섬의 묘한 분위기와 연관 있으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내 손 놓지마’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 됐습니다.
즉, 레위니옹 섬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휴양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긴장감이 배가되는 효과가 있고,
도주길에 오른 마샬 앞에 펼쳐진 화산섬의 험한 지형은 읽기만 해도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이미지 외에 이 섬이 반드시 사건의 주 무대여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또, 꽤 상세하게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인종적 특징이나 종교적 차이 역시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게 단지 ‘캐릭터 설명용’으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을 굳이 백인-흑인-혼혈-원주민으로 구분한 이유도 잘 모르겠고,
그들 간의 인종적-종교적 갈등이 살인사건에서 특별한 동기나 배경으로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휴양지 손님들은 백인이고, 종업원들은 원주민이나 혼혈인 것이 전부입니다.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많이 부족했는데,
우선, 용의자로 낙인찍힌 채 딸과 함께 도주길에 오른 마샬이 책의 1/3지점까지
장황하고 난해한 행동과 모호한 독백만 거듭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미스터리를 읽고 있는 거지? 누명을 쓴 도망자? 잔혹한 소시오패스?”
적절한 정보와 떡밥이 제때 노출돼야 독자들을 미스터리의 흐름에 끌어들일 수 있는 법인데,
마치 모든 걸 감춰놓고 작가 혼자서만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마샬과 대척점에 서있는 지역헌병대, 즉 수사를 맡은 인물들의 역할 배분도 아쉬웠습니다.
분명 혼혈 여성대장 아자 푸르비가 주인공인데, 정작 그녀의 역할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얼마 안 되는 비중마저 부하인 크리스토와 나눠 가진 탓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여성+혼혈+수사책임자로 설정됐지만 그 설정은 이야기 어디에서도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3~4대에 걸친 그녀의 가계도가 왜 장황하게 설명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자 푸르비를 비롯한 지역헌병대는 그저 쫓는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히 범인의 행적을 발견한 것 외엔 딱히 수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레위니옹 섬의 비극의 진실과 반전은
그나마 앞서 쌓아온 서사들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단조롭고 억지스러웠습니다.
동기는 둘째 치고라도, 범인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고 수고스러운 범행계획을 세운 것인지,
또, 마샬은 왜 딸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경찰의 추적을 자초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사건 자체가 작위적으로 ‘꾸며졌다’는 느낌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앞선 두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탓에
미셸 뷔시의 신작에 대해 이렇게 혹평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검은 수련’의 묵직한 서사와 ‘그림자 소녀’의 사건 이면의 깊은 울림을 만나진 못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미셸 뷔시가 자신의 주 무기를 잘 살려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