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하트힐
토머스 H. 쿡 지음, 권경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2013년 가을, ‘채텀 스쿨 어페어로 토머스 H. 쿡과 처음 만났고,

2015년 봄, ‘밤의 기억들로 재회한 이후 또다시 2년이 지나 그의 신작을 만났습니다.

그의 초기작 또는 대표작인 심문붉은 낙엽을 읽어야지, 몇 번씩 생각만 하다가

매번 다음에...’라며 기약 없이 뒤로 미루곤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찾아오는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의 초기 장편이지만) 신간 소식에 쿡의 이름이 보이자마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덥석 손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 ● ●

 

1962년 여름, 미국 앨라배마 주 촉토 마을의 브레이크하트 힐 아래에서

16살의 아름다운 고등학생 켈리 트로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된다.

평온함이 일상이던 마을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현장에서 마을의 건달인 라일이 목격되고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 켈리에게 재앙이 덮친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 진행형이다.

켈리의 친구였던 벤과 루크는 켈리의 비극 속에 진실이 감춰져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진실의 씨앗은 켈리의 첫사랑 속에 있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의 경우

소도시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브레이크하트 힐과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의 주된 서사가 어른들의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브레이크하트 힐은 몸과 마음이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돼있던

1960년대의 10대들이 겪은, 보다 날것 같은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누가?’, ‘?’라는 의문이 불온하게 마을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로 분류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가 16살 소년, 소녀 벤 웨이드와 켈리 트로이의 치명적인 첫사랑이기 때문에

왠지 장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틴 로맨스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쿡이 그린 벤과 켈리의 로맨스는 포장10대의 치기 어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알맹이는 심연을 그린 듯한 잔혹심리극에 다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눈부시고 미래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해야 할 16살의 소년과 소녀는

쿡의 잔인하기 그지없는 문장들 속에서 계속 엇갈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판타지가 아니라 왜곡된 감정으로 진화할 뿐입니다.

번역하신 권경희 님 표현대로 사랑은 어떻게 미움이 되고 증오가 되는가,

사랑이 얼마나 깨지기 쉬우며, 편견이 얼마나 무모하고, 증오가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가,

토마스 H. 쿡이 이 작품에서 그린 10대 소년, 소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쿡이 우울한 10대 로맨스 이야기에서 머문 것은 아닙니다.

30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마무리됐고,

희생된 켈리와 각별한 관계였던 벤과 루크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켈리를 사랑했던 벤, 그런 벤을 곁에서 지켜봤던 루크,

그리고 함께 10대를 보냈지만 이젠 중장년에 이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브레이크하트 힐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잊지 못하면서 여전히 진실을 궁금해합니다.

이야기는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오가며 켈리의 비극의 진실을 아주 느린 속도로 풀어놓습니다.

안 그래도 어둡고 습하고 탁하기 이를 데 없는 쿡의 문장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늘어진 덕분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듯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쿡의 작품답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끝까지 진짜 모습 인격도, 감정도 을 알 수 없었던 켈리의 캐릭터가 모호했고,

마지막에 드러난 30년 전 사건의 진실이 예상보다 덜 충격적이었으며,

특히 반전이 (설명 부족인지 제 이해력 부족인지 모르겠지만) 납득되지 않는 점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를 읽은 후에도

사건의 실체가 강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을뿐더러, 개운치 못한 느낌이란 서평을 남겼는데,

브레이크하트 힐의 모호함과 개운치 못함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쿡 특유의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은 제법 만끽할 수 있었지만,

채텀 스쿨 어페어와 마찬가지로 브레이크하트 힐역시 초기 장편이란 점에서

아직 그의 미덕이 만개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었고,

아무래도 그의 진짜 후유증과 진면목을 맛보기 위해서는

쿡의 팬들이 열광하는 붉은 낙엽심문을 찾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