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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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사무직을 그만두고 수화 통역사가 된 아라이 나오토는

자신이 근무하던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살해된 자는 농인(聾人) 재활시설의 대표로,

17년 전, 같은 시설의 대표로 있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포된 범인은 농인이었고, 말단 경찰 아라이는 그의 수화 통역을 맡은 바 있습니다.

통역 도중 사건 수사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감지했지만

강압적인 상부의 지시 때문에 이의 제기 한 번 못했던 아라이는

17년이 지나 똑같은 방법으로 그 아들이 살해된 사건을 접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경찰은 17년 전 사건의 범인인 몬나 데쓰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쫓지만,

아라이는 농인이 연루된 두 사건의 이면에 전혀 다른 비밀과 진실이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 ● ●

 

데프 보이스속 인물들은 세 개의 캐릭터 – ①농인(聾人, 들리지 않는 사람),

청인(聽人, 들리는 사람), 그리고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세 번째 캐릭터의 대표적 사례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인데

이들을 가리켜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부르며,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이었던 어린 시절의 아라이에게

들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는 세상과 가족을 연결하는 통역사였지만 정작 가족 안에서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농인인 부모와 형은 아라이는 끼어들기 힘든 자신들만의 유대로 뭉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면서 가족과 멀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농인의 세계와도 연을 끊으려 했지만,

경찰 사무원이 된 뒤에도, 또 경찰을 그만둔 뒤에도

들리지 않는 사람과의 인연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선 아라이 나오토의 트라우마와

17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을 엮은 미스터리입니다.

더불어, 농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농인들 간의 갈등과 딜레마까지 다룸으로써

30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다양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사실,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설정이지만,

작가는 아라이를 통해 농인 대 농인의 갈등, 농인 대 청인의 갈등을 정교하게 그려냄으로써,

또 가족-이웃-사회가 어떻게 그 갈등을 촉발시키고, 부추기고, 억누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미스터리 이상의 여운과 감동을 전해줍니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카피는

17년 전 아라이가 통역을 맡았던 농인 용의자의 막내딸이 던진 수화 질문입니다.

아라이는 당혹스러운 표정만 보여줬을 뿐 소녀에게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만이 아니라 아라이는 그때까지 평생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들리는 사람인가, ‘들리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며, 누구의 적인가?

 

가족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경찰직 중에도 일부러 사무직을 택했고,

농인 자녀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결혼마저 파탄에 이르게 방치한 것을 보면

아라이의 무의식은 ’, 그러니까 들리는 사람의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삶을 계속 뒤흔들었고,

결국 경찰 퇴직 후 수화 통역사가 되어 또다시 농인들에게 돌아오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온전히 우리 편이 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마지막까지 이 곤란한 딜레마를 아라이에게 끊임없이 던집니다.

 

일본 내 농인 사회의 갈등과 딜레마를 강조하기 위해

조금은 과도한 분량을 할애하여 전문 정보와 주제의식을 설명한 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속에 농인의 문제를 현실감 있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제대로 알지 못했던 농인들의 고민과 실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중간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데프 보이스는 누가 범인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작품의 밑바닥을 흐르는 좀더 큰 서사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라

미스터리가 좀 쉬워 보이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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