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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ㅣ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산산이 부서진 남자’와 ‘내 것이었던 소녀’에 이어 한국에 소개된 조 올로클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로보텀의 홈페이지를 보면 ‘산산이 부서진 남자’ 앞에 ‘The Suspect’(한국 출간 2005년, ‘용의자’), ‘The Drowning Man’이 있으니, 전체로 보면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3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두 소녀 – 태쉬와 파이퍼 – 사건이고, 또 하나는 세미나 때문에 옥스퍼드에 들른 조가 본의 아니게 휘말린 부부살해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라진 소녀 파이퍼가 쓴 일기장 같은 기록엔 외모도, 집안도, 성향도 전혀 다른 두 소녀가 가족, 학교, 이웃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들에게 되갚아줬던 복수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옥스퍼드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런던에서의 그림 같은 삶을 꿈꾸던 그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과 단절됩니다. 한편, 조는 부부살해사건 때문에 옥스퍼드 경찰에 협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소녀실종사건과의 접점 - 피살된 부부의 농장 인근의 얼어붙은 호수 밑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 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내 수사팀의 중심이 되어 두 사건을 동시에 조사합니다.
이번에 조가 맡은 사건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규모나 복잡성 면에서 단순한 편입니다. 사건에 개입하는 과정 역시 본인 또는 가족이 고통스럽게 연루되는 방식이 아니라 출장지에서 우연히 협조요청을 받는 식으로 한 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먼저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비교적 안정적인 컨디션입니다. 파킨슨병은 그의 애정행각(?)에 전혀 영향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한 증상만 보입니다. 별거 중인 아내 줄리안이나 딸 찰리와도 큰 트러블 없이 오로지 사건에만 매진합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는 가족들이 사건에 워낙 깊이 말려든 바람에 긴장감은 높아졌지만, 심연 같은 상심에 빠진 조를 지켜보는 일이 꽤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의 가족들은 안전지대(?)에 머물며 독자들이 조의 활약에만 매진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안하다고 말해’는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지닌 작품입니다. 전작의 범인들은 조 못잖은 심리전문가들로 피해자를 마음껏 좌지우지했고, 그런 만큼 조의 수사는 임상심리학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심리학자라기보다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물론 여전히 용의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통해 경찰의 1차원적인 수사의 허점을 밝혀내고 있지만, 이미 여러 건의 위험천만한 사건을 겪으면서 탐정의 기질까지 익힌 덕분인지 찰떡궁합의 파트너인 전직 경찰 빈센트 루이츠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추리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의 새로운 면모는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다른 스릴러 주인공들과 차별화됐던 ‘심리학자’의 미덕이 무뎌진 느낌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용의자들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진단들이 대부분 “그냥 볼 땐 몰랐지만,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고 보니 그는 이런이런 이상심리를 가진 게 분명합니다.”라는 식의 결과론처럼 읽히곤 했는데, 조 올로클린과 마이클 로보텀의 팬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아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마이클 로보텀의 글빨은 이런저런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줍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가 소름 돋도록 서늘한 런던의 빗방울 같은 문장들이었다면, ‘내 것이었던 소녀’는 살인극 속에 깃든 냉소적인 블랙유머가 빛났고, ‘미안하다고 말해’는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정통 스릴러의 맛이 묻어난 작품입니다. 괜히 현란하고 난해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과도한 감정 묘사나 불필요한 선정적 묘사로 분량을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방대한 분량을 놓고 이 작품을 번역한 최필원 님께서 ‘흉기’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마이클 로보텀의 문장이 갖는 매력 덕분에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조’ 대신 ‘명탐정 조’를 만난 것이 아쉽다고 평하긴 했지만, 그만큼 마이클 로보텀의 정통 스릴러의 묘미를 맛봤던 것은 나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현재의 사건을 통해 과거의 미제 사건을 해결한다는 구성도 매력적이었고, 파이퍼의 기록에서 드러난 10대의 폭주, 문제적 가족, 소도시 마초들의 집단적 폭력성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랜 파트너이자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빈센트 루이츠는 언제나처럼 반가웠고, 전작에서 악연으로 만났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와 미묘한 관계로 발전한 미모의 심리학자 빅토리아 나파르스텍의 향후 행보도 관심을 끌었습니다.
다음에 읽을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 어떤 작품이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The Suspect’일지, 최신작인 ‘Close Your Eyes’일지, 아니면 또 다른 스탠드얼론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 됐든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라면 이젠 확실히 must-read 목록의 최상단에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